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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름 Jul 15. 2024

도망가자, 그리고 돌아오자 씩씩하게

아름세계 2024년 창간호 ㅣ 신작 에세이 ㅣ 강아름

 오늘은 야간 근무이다. 입원한 수용자를 계호(戒護, 수용자를 경계하면서 보호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교정 용어)하러 대구에 있는 대학병원까지 가야 하기에, 일찍 사무실을 나와야 한다. 1시간 30분 정도가 남았다. 오전에 상담은 미리 해두었으니, 상담 기록만 작성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뜻대로 되었다면 글감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치 동해의 파도처럼 계속 새로운 일이 밀려온다. 타기 싫은데 억지로 끌려온 나는 꾸물거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 하릴없이 서프보드를 들고 먼저 오는 파도부터 차례대로 타려고 한다.


 첫 번째 파도는 탈 만하다. 이번 주까지 우리 팀 관련 시설 확충에 대한 예산을 신청해야 한다. 팀장님이 교육실을 사무실 가까이에 하나 마련하자고 하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는 빈 장소가 없다. 그래도 한번 돌아보자고 하셔서 같이 나갔다 온다. 없는 것을 확인하시고, 프로그램 담당 직원들과 상의해서 리모델링 비용이라도 신청하자며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1시간 10분이 남았고, 아직 신청은 못 했다.


 두 번째 파도는 첫 번째 파도를 타고 조금 더 높이 올라온다. 곧 소장님이 바뀐다는 소식이다. 팀장님이 들은 바로는 수용자 교육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교육실이나 사무실에 자주 오셔서 진행 상태를 확인하신다고 한다. 안 그래도 수용자를 심리치료 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의구심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장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 과장님이 확인하러 오실 수 있으니 당장 업무 현황이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시간이 부족하니 다음 주에 만들겠다고 하자, 팀장님이 직접 하시겠다며 양식이라도 있으면 달라고 하신다. 작년 양식만 찾아서 드리면 될 것 같지만, 신경 쓰이는 부분이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인데, 팀장님에게 맡기는 것이 불편하다.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고, 야간 근무를 하면 다음 날은 휴일이다. 그러면 주말을 보낸 후 다음 주에 출근하는데, 팀장님은 이번 주 내에 업무 현황을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게다가, 팀장님이 업무 현황을 만드시다가 궁금한 것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의 대직자에게 물어볼 것이다. 따라서, 미리 업무를 넘기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어디까지 업무 현황을 만들어서 팀장님께 보냈는지 말씀드려야 한다.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은 대직자가 이번 주에 매우 바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몇 가지 일을 도와주기로 했었는데, 도와주기는커녕, 일을 더 떠넘기고 가야 하는 것이다. 급히 작년 양식을 수정해서 팀장님께 메일로 보내드리고, 대직자에겐 전후 사정과 팀장님께 보내드린 업무 현황을 메일로 보내며 양해를 구한다.


 두 번째 파도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있는데, 다음 파도들이 동시에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남은 시간 50분, 아직 예산 신청도 못 했고, 상담 기록 작성도 못했다. 띵동! 가족 통보 관련 신청이 들어온다. 우리 팀에서 수용자 가족에게 직접 전화하여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 주는 일을 한다. 다만, 긴급한 경우에만 허용하므로 조건이 까다롭다. 그런데 근무자들이 그 조건을 잘 몰라서 해당하지 않는 수용자들이 신청해도 그냥 결재받아서 우리 팀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2명이 신청했는데 1명은 해당하지 않는 상황이다. 빠르게 담당 근무자께 전화하여 사유를 다시 물어보고, 가족 통보의 조건을 설명한 후,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서 허용할 수 없음을 전달한다. 한 번에 알아듣는다면 좋겠지만, 하필이면 담당 근무자가 아닌 교대 근무자가 전화를 받는다. 담당 근무자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두 번, 세 번 설명하여 이해시킨 후 전화를 끊는다. 나머지 1명도 담당 근무자께 전화해서 사유를 구체적으로 다시 듣고, 팀장님께 전달해 드린다.


 가족 통보를 요청하면서, 예산 신청 관련해서 다시 묻는다. 지금 만들어서 주겠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남은 시간 30분, 최대한 빨리 상담 기록을 작성한다. 3분의 2정도 작성했을 때, 팀장님이 예산 신청 관련 파일을 넘겨주신다. 바로 담당 부서에 보고하고 다시 상담 기록을 작성한다. 곧, 전화가 온다.


"보내준 파일에 신청한 금액이랑 보고한 금액이 다르네. 다시 보내줘요."


 남은 시간 10분, 상담 기록 작성을 멈추고, 다시 금액을 수정해서 보고한다.


 그 순간, 삐이이이이이! 왼쪽 귀에서 매우 큰 소리가 5초간 들린다. 어머니를 포함한 주변에서 이명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별일 아닐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너무 당황스럽다. 예상보다 큰 소리에 놀라고,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무섭고, 와중에 빨리 상담 기록을 작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하다. 여러 감정이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든다. 숨이 가빠진다. 나에게 상담을 요청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그 친구도 일을 하다 숨이 안 쉬어진다며, 제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했던 적이 있다.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준 후, 다음에 또 숨이 안 쉬어질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 심호흡을 제안했다. 몰래 화장실 같은 곳에 가서 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1분만 달라고 한 뒤 심호흡하라고 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는 시간보다 2배 정도 천천히 내뱉으면서 몸의 힘을 풀어보라고 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방법이다. 남은 시간 중 1분만 나에게 투자하자. 심호흡을 3번 하는 동안, 왼쪽 귀에 남아있는 소리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옅어졌다. 이명이 정말 무서운 점은, 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소리의 촉감'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소리가 너무 커서, 소리가 훑고 간 귓구멍에 상처가 생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심호흡이 효과가 있다. 심장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빠르게 상담 기록을 다시 작성한다. 다행히 제시간에 마무리되어, 병원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심호흡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일을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왔으나 머리가 너무 복잡한 상태였고, 감정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 순간, 화물차 하나가 내 앞으로 끼어든다. 하, XX. 열받는다. 차를 화물차 꽁무니에 바짝 붙여 기 싸움을 건다. 화물차는 승용차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신의 앞에 있던 차 하나를 추월한 후 원래 차선으로 돌아간다. 빈 차선으로 보란 듯이 과속하며 분노를 해소하려 하지만, 가라앉질 않는다. 별거 아닌 일로 화를 내는 모습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우울해진다. 오늘 실수도 잦았고 업무도 잘 처리해 내지 못한 것 같다. 운전하기가 너무 힘들 정도로 생각이 많아지지만, 병원에 늦을까 봐 쉬지도 못한다.


 막상 병원에 도착하니 교대하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병원 건물 내에 먹을 것이 있는지 둘러본다. 지하 1층에서 '앤티앤스(Auntie Anne's)'를 발견한다. 갑자기 배가 고파지고 침이 가득 고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레즐 브랜드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몬드 토핑이 올라간 스틱 모양의 빵 안에 크림치즈가 잔뜩 든 스틱 프레즐이다. 한입 베어 물자, 오돌토돌한 아몬드 토핑과 쫄깃한 빵, 그리고 흘러나오는 달고 짭짤한 크림치즈가 내 뇌를 정복한다. 복잡하던 생각과 요동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프레즐을 향한 욕망만이 가득하다. 크림치즈가 내 혈관에서 흘렀으면 좋겠다. 그제야 오늘 하루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오늘 내가 이명을 겪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폭력성을 가진 수용자들은 대부분 분노를 조절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한다. 그런 수용자들과 상담할 때마다 했던 이야기가 있다.


 "화가 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치는 거예요. 거실 안에 있어서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근무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화장실이라도 가서 그 순간을 회피해야 해요. 스스로 분노를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인내심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지력이고, 분노는 감정인데, 의지력은 총량의 법칙을 따르지만, 감정은 따르지 않아요. 쉽게 말하면, 의지력은 쓰면 쓸수록 줄어드는데, 감정은 써도 써도 유지되거나 강화돼요. 의지력을 다 쓴 상태에서는 평소에는 괜찮던 작은 자극에도 화가 나겠죠. 통제가 안 되니까요. 그런데 그 화를 애써 참아내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분노가 더 커질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남을 욕하거나 때리는 방식으로 화를 푸는 것은, 본인도 알겠지만, 어떤 사회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습관을 고치지 않는다면, 계속 여기 들어올 거예요. 그리고 고칠 방법이 있잖아요. 슬기롭게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화가 나면 도망가고, 후에 필요하면 상담을 요청하세요."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해줄 필요가 있는 말이다. 현재까지 이명 발병에 영향을 끼친다고 추측하고 있는 주요 요인은 과로와 스트레스이다. 일 자체가 많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일을 처리한 것은 맞다. 더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매우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의지력은 쓰면 쓸수록 줄어든다. 결국 한계를 넘어섰을 때, 이명이 생긴 것이다. 심호흡하면서 간신히 업무를 처리하고 운전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틈을 만들었지만,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의지력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트럭이 끼어드는 것에도 분노하고, 그런 자신을 자책하며 우울해하고, 빨리 가야 한다는 조급함에 불안해한 것이다. 병원에 도착해서 프레즐을 한입 먹고 나서야 감정이 폭발했던 자동차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고, 맛있는 음식으로 인해 분비된 도파민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 것이다.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수용자들에게 수없이 이야기했던 내용들인데, 나 또한 프레즐의 도움을 받아 분노로부터 도망가고 나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심지어 수용자들은 자유가 박탈되어 있고, 대부분 가족, 친구 등 관계나 일상이 무너져 삶의 끈이 연약해져 있는 상태이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만으로 의지가 바닥날 것이다. 나도 욕하고 다 때려 부수고 싶지만, 가진 것이 있고 주변 상황들이 나를 제어하고 있기 때문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왼쪽 귀에 아직도 이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괜히 손으로 귓구멍을 만져본다. 음, 이상은 없다. 괜찮을 것이다. 내 왼쪽 귀도, 폭발했던 감정도. 이 글이 나의 경계선이 되어 줄 테니.


 "화를 참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경계선'을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경계선은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나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내가 있는 장소에서 심리적으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간단합니다. 화가 난 장소에서 도망치십시오. 인간은 재밌게도 두 다리를 사용하여 도망치면, 그 감정에서 실제로 도망칠 수 있습니다." by 김경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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