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가는 버스
아름세계 2025년 1월호 ㅣ 신작 에세이 ㅣ 강아름
통영의 겨울은 참 따뜻하다. 날씨가 좋아 보여서 숙소에 패딩을 벗어 두고 나왔는데도 그리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유혹하는 짭짤한 바다 맛과 담백한 충무김밥의 하모니. 좁은 시장 골목 사이로 들리는 정겨운 사투리들. 맛 좋아 보이는 전복과 해삼이며, 도미에 방어까지 고이 마음 주머니에 담는다. 시장을 지나 완만한 언덕을 오른다. 양옆에는 좁고 가파른 피랑을 따라 울긋불긋한 마을이 열심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햇빛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춘다. 문 앞에 서서 이제 들어오는 거냐고 묻는 한 새악시의 손엔 빨간 딸기 한 팩이 들려있다. 괜찮다며 미소 짓는 서방의 눈엔 그녀의 얼굴이 담겨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들의 뒷이야기를 마음대로 펼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충렬사. 백석 시인도 앉아 시를 쓰던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를 올라간다. 돌아보니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지금보다도 더 훤하게 보였을 통영에서, 백석은 사랑하는 그이를 찾았다. 산 너머로 가는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에게서, 샘터에서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에게서, 그녀의 얼굴을 찾았다. 그러나,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이 피는 철에 시집을 가버릴 것만 같은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도 통영의 가파른 언덕 곳곳에 시선을 기대며 그이를 찾는다. 어디에 있을까. 등이 드러나는 짧은 검은색 니트 위에 하얀 패딩을 걸치고 하얀 캐리어를 들고 떠나던 그녀. 호두과자와 피로 회복 음료를 마시며 혼자만의 여행을 단단히 즐기려는 나의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온 그녀는 쓸쓸함이었다. 어떤 말과 생각으로도 합리화되지 않는 지독한 고독이 건드려진 나는 통영 가는 버스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어떤 말을 건넬지 고민하다 내린 결론.
"혹시 목적지가 비슷하면··· 택시, 같이 타고 가실래요?"
그녀가 분명 여행자라는 것, 캐리어를 들고 왔다는 것, 통영종합버스정류장에서 주요 관광지까지 버스 타고 가기가 애매하다는 것 등을 머릿속에서 철저히 종합하여 내린 비겁한 배려였다. 통영까지 가는 1시간 동안, 혹시 말을 걸까 싶어 괜히 가져온 한강 작가의 책을 읽어 보기도 했고, 부질없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기도 했다. 통영에 도착했다. 그녀가 손님들이 다 내릴 때까지 짐 정리를 하고 있어서 먼저 내렸다. 정류장 바로 앞에 길게 줄 서 있는 택시들. 나는 바로 타고 갈 수 있었지만, 화장실에 가려는 사람처럼 정류장 내부로 들어갔다. 적당히 둘러보다 다시 나오자, 그녀가 오고 있었다. 자기 몸보다 더 두꺼운 하얀 패딩을 입고 자신의 몸보다 더 큰 하얀 캐리어를 끌며 나에게 오고 있었다. 설렘과 두려움의 공존. 멈추지 않는 두근거림. 그러나 그녀는 무심하게도 길을 찾는 것처럼 핸드폰을 보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택시승강장을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쓸쓸함과 지독한 고독. 그것들은 멧돼지처럼 습격하여 울타리를 부숴버렸다.
통영의 풍경은 참 아름답다. 높고 낮은 빌딩들 사이에 조화롭게 솟아있는 목욕탕 굴뚝들. 그것들을 끌어안는 아늑한 연안. 여전히 바삐 움직이는 시장의 상인들과 행복한 여행객들의 들뜬 걸음. 고즈넉한 충렬사의 동백나무에서 들려오는 새의 노래에 젖고, 울음에 잠긴다.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 나는 이 아침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춥게 입고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서 캐리어를 달달달 끌고 다니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