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여러 상황에서 꿈을 가집니다. 행복한 순간에 더욱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경우도 있지만, 희망이 없어보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서 현실이 나아질 것이란 바람을 담은 꿈도 꾸곤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모든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기 한 소녀가 꾼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비달의 캐릭터성, 현실과 판타지의 조화가 특징적인 영화입니다.
1. 비달의 캐릭터
영화 <판의 미로>는 오필리아가 환상적 세계를 탐험하는 장면과 비달이 현실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교차편집 시켜놓은 영화입니다. 영화 속 오필리아는 환상을 탐험하는 소녀임과 동시에 사라진 공화국의 향수를 느끼는 한 시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비달은 공화국을 전복시킨 파시스트이자, 오필리아에게 지속적으로 시련을 안겨주는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중 오필리아는 3가지의 시련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그 시련의 끝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모두 비달로 귀결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시련에서 마주한 괴물은 거대한 두꺼비입니다. 거대한 괴물 두꺼비를 마주한 오필리아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말하며 이런 곳에서 벌레나 잡아먹는 것이 부끄럽지 않냐고 일갈합니다. 해당 대사는 두꺼비에게 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는 비달에게 말한 것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선 괴물 두꺼비가 사는 곳은 고목 아래에 있는 땅굴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두꺼비로 인해 고목이 되었죠. 수많은 생물이 살았던 삶의 터전인 나무를 파괴한 터에서 자신보다 훨씬 약한 벌레나 먹으며 사는 두꺼비는 비달과 같습니다. 비달이 의미하는 파시스트가 수많은 사람들이 살던 스페인 공화국을 파멸시키고 난 후 죄없는 민간인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말이죠. 그런 그에게 하는 오필리아의 대사들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두번째와 세번째 시련의 마지막에는 각각 손에 눈이 달린 괴물과 비달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얼핏보면 연관이 없어보이지만 서로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의 걸음걸이와 자세, 손을 뻗어 오필리아를 헤치려는 것과 같이 상당히 연상되는 요소가 많습니다. 게다가 오필리아가 분필을 통해 그들의 공간에 들어갔다는 점과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검과 아기)이 완전히 타인의 손에 넘어갔을 때 그들은 생을 마감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특성을 지닙니다.
또한 극중에서 비달을 상징하는 요소는 시계입니다. 그리고 그 시계는 부자관계 혹은 폭력의 연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죠. 비달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은 시간을 기록한 시계를 다시 돌아가게 만든 인물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겠다 혹은 신경쓰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시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 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하는 깨진 유리는 바꾸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비달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으면서도 아버지와는 다른 인물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는 부서진 시계를 고치며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듯 하였지만 아버지와 같은 군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죽은 시간을 아들에게 전하려는 욕구도 가지고 있었죠. 아버지와 닮은 거울 속 자신의 목을 그으면서도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비달은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2. 현실과 판타지
앞서 말했듯이 오필리아는 사라져버린 스페인 공화국이라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파시스트들이 점거한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오필리아에게 현실은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각박하고 괴로운 곳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낯선 남자를 아버지로 부르라는 요구를 받고, 원래 아버지를 잊도록 강요받았으며 어머니도 잃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인물과도 함께하지 못하게 되는 등 현실은 오필리아에게는 너무나 잔혹한 곳이었습니다. 현실이 너무나 괴로워 견딜 수 없어진 순간 그녀의 현실과 환상은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진실인지 허상인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그리고 그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그녀는 씁쓸하게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또한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엔딩의 역재생 장면입니다. 관객들로 하여금 가혹한 삶을 살다 바스라져버린 한 아이의 시간을 돌려 그 아이가 꿈꾼 환상과 그 환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오필리아가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현실에 더 이상 오필리아는 없습니다. 그 대신 오필리아와 비슷한 바람을 가진 이들이 오필리아의 동생과 서있습니다. 오필리아에게 잔혹한 현실을 알려준 것도 어른이지만 그녀의 동생에게 평화를 안겨줄 수 있는 존재도 어른입니다. 그녀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자장가를 불러주며 그녀의 남동생은 이런 현실을 겪게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하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이라는 이야기를 이 영화는 건네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폭력과 증오의 굴레가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대해 현실과 판타지의 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표현한 명작 <판의 미로>였습니다. 이 영화는 어른은 잔혹한 현실을 만들 수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평화를 불러올 수도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어른을 위한, 또 부모를 위한 잔혹동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