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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희 Apr 13. 2022

그늘의 포근함으로부터

이제니의 '밤의 공벌레' 읽기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 이제니, <밤의 공벌레>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나는 화분 죽이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남들이 주라는 대로 물을 줘도 내 화분은 늘상 금방 얼굴이 누렇게 뜨곤 한다. 그럴 때면 온 힘을 다해 서 있는 파란 줄기가 안쓰러웠다. 한 번은, 잎이 다 누래진 연구실의 화분을 버립시다 하고 교수님께 말씀드리자, 아직 줄기가 파랗다 기다려보자 하셨다. 그래서 난 또다시 물을 주기 시작했다. 끝내 화분은 살아나지 못했다. 어떻게 보내주어야 하는지도 몰라서 화분에 “어떻게 버리는지 몰라서 그냥 여기 둡니다. 죄송합니다.”라는 포스트잇을 붙여 쓰레기통 옆에 세워두었다. 다음날 화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청소하시는 어머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화분은 서양난이었는데, 물을 많이 안 주어도 잘 살아가는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라고 했다. 다만, 햇볕을 잘 쐬어야 했는데 연구실엔 햇볕이 잘 드는 곳엔 공간이 없어서 그늘에 세워두었었다. 어쩌면 그게 화분을 살릴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하고 이제야 추측할 뿐이다.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꽃이 지는 것을 보고 화자는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틀린 맞춤법으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줄기가 아직 파랗게 남아있던 서양난처럼 화자는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이고 하염없이 얼음을 지친다. 그 틀린 맞춤법은 나의 잘못이 아니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얼음을 지칠지도 모른다. 내가 틀리게 살아온 게 나의 잘못이 아닐 때 더욱 무기력해진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서, 사회에서 만들어낸 틀에 갇혀 살아온 내가 틀에 맞추어져 있음을 느낄 때 같이, 내가 틀리게 살아온 게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무기력하게 사회의 틀 앞에 고개 숙이고 내 삶의 시간 동안 틀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바늘을 꺾어버린 채 돌아가지 않는 시계 앞에서 빙판 위를 누비고 그대로 지친 내가 밥을 먹는 건 그 틀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도피가 될 것이다.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시계는 도구다. 그 말인즉슨 시간 그 자체가 아니다. 바늘을 꺾는다고 이 삶이 멈추진 않는다. 우리는 근대를 지나면서 나와 세상을 도구를 통해 인식해왔다. 시계의 바늘을 꺾으면 쪼개어진 분초를 계량할 수는 없겠지만, 연속해서 흐르는 나의 삶을 꺾어버릴 순 없다. 그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알려주는 것이 매일 아침 뜨는 태양일 것이다. 한때 아침에 해가 뜬다는 사실이 너무나 좌절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니 하기 싫은 마음으로 시간이 가는 게 미워 시계의 건전지를 다 빼버리고 휴대폰도 꺼놓고 주말을 보냈다. 나는 지금이 몇 시 몇 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망할 놈의 해 때문이었다. 암막 커튼이란 걸 그때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아무튼 시곗바늘을 꺾고도 해가 떠오르자 꽃이 핀다. 지금이 몇 시일지는 모르지만, 햇살이 눈부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주기도문을 외운다. 울음을 참기도 어렵고, 몇 시인지도 모르는 이성이 마비된 순간, 아직도 내 줄기는 새파래서, 배는 고프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밤의 감상(感傷)의 가장 큰 적은 배고픔이다. 반대로 내가 살아있음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아군도 배고픔이다. 새벽의 왕만두 찐빵을 생각하며, 꼬르륵 소리를 내며 웅크린 화자는 밤의 공벌레를 떠올린다. 혹은 화자의 눈앞에 공벌레가 마침 지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해가 떠도 꽃이 펴도 공벌레도 나도 여전히 그늘이다. 공벌레는 그늘에서만 서식하는 벌레다. 하지만 사실 그늘은 포근하다. 내가 시계 건전지를 빼고 누워있던 방이 채광이 안 좋은 방이었다면, 항상 그늘이었다면 나는 영영 하루가 가는지도 모르고 삶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벌레는 위협을 받았을 때 웅크리고, 나는 배가 고플 때 웅크리고. 둘 다 살려고 웅크린다. 아, 살기 위해 반드시 온 힘을 다해 눈을 깜빡이고 지칠 때까지 얼음을 지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다시,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한다. 이제 화자는 꽃이 아니라 줄기를 본다. 꽃과 잎이 지고 피는 것만이 아니라, 아직 줄기가 파란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본다. 그렇다고 해서 틀렸던 화자의 맞춤법이 맞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면하기 무서웠던, 내 탓이 아님에도 내 호주머니에 가득 들어있던 틀린 맞춤법을 꺼내어, 다시 부끄러움으로 기록한다. 온 힘을 다해 살아가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틀린 맞춤법이 부끄럽다는 것 정도는 알고 살아가는 정도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그늘은 포근하다. 나는 그늘, 하면 나무 그늘에 앉아 낮잠을 자던,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 속의 목동이 떠오른다. 반대로 해는 너무 따갑다. 해, 하면 해와 바람이 내기하던 동화책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나에게 해는 사람을 발가벗기는 무서운 재주를 가진 존재였다. (여담으로 나는 어릴 때부터 해가 긴 여름을 정말 싫어했다.) 이 시의 배경에는 해와 그늘이, 전경에는 꽃나무와 공벌레가 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나’의 생각을 중심으로 시가 서술되고 있다. 밤에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는 허무한 서술 이후로, 눈을 깜빡이고 얼음 위를 지칠 때까지 달리려 하고, 밥을 두 그릇을 먹으려 하는 온 힘을 다하는 모습이 나온다. 반대로 해가 떠오르고 꽃이 피자, 오히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싶어 하고, 주기도문을 음독하고, 왕만두 찐빵을 ‘먹고 싶다.’(앞에서 밥을 ‘먹는다.’고 한 것과 다르다.) 꽃은 해가 뜨면 살아난다. 그러나 공벌레는 해가 떠도 그늘에 있다. 화자도 여전히 공벌레와 같이 그늘에 있다. 그런데 그늘에 함께 있는 존재, 공벌레를 보자 화자의 인식이 전환된다. 물론 서술은 같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화자는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화자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공벌레와 함께 그늘에 있다. 하지만 그는 시곗바늘을 부러뜨리거나 그저 밥만 먹거나 눈만 깜빡이지 않고, 기록한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그늘은 화분을 죽인다. 화분이 죽는 것을 보며 나는 다 부질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 줄기가 파랗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또 한편으로 나는 화분과 같지 않아서, 햇살을 받는다고 다시 살아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햇볕은 너무 따가워서, 나는 내 방에 암막커튼을 달았다. 공벌레는 그늘에서만 산다. 그러나 나는 또, 공벌레와는 달라서 떠오르는 해를 무시하고 그늘에서만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햇볕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살아내는 것도 나를 죽이고 그늘에만 있는 것도 나를 죽인다면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는 않더라도, 나는 기꺼이 나의 틀린 맞춤법을 마주하겠다. 그늘의 포근함을 만끽하면서도 죽었던 화분이 살아나는 광경을 지켜보겠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의 부끄러움을 계속 써내려 가겠다.


아마 우리는 그늘을 위로라고, 햇볕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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