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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희 Apr 26. 2022

호락호락의 낯섦과 익숙함

임희구의 <소주 한 병이 공짜> 읽기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 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 임희구, <소주 한 병이 공짜>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글쓰기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석사과정  매주 시를 골라오는 수업의 과제로 가져갔던   편을 찾아 뒤적거렸다. 시라도 읽고, 무엇이라도 쓰자 하는 마음이었다.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다는 화자의 첫마디는 막막한 나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사실 금주와 글쓰기는  속성이 다르다. 금주는 일상적으로 하던 행위를 멈추는 것인데 반해, 글쓰기는 일상적으로 하지 않던 행위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금연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성공하는 가장 쉬운 도전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뒤적거린 시편들 가운데  시가 눈에  것은 '' 결심하고 나선 '막막한' 나를 집어넣게 되는  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고백하건대 언어의 일탈과 이미지의 비틀림으로부터 지적 유희를 즐기기 위해 시를 좋아했던 나에게, 임희구 시인의  시는 사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종류의 시였다. 그는 일상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일상적인 소재를 시에 그려나가기 때문이다. '감자탕' '소주  '이라니! 지금 당장에라도 학교를 뛰쳐나가 고개를 들면 간판에도 있을  단어들.  글쓰기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들었다. 시에서 날이 꾸물거리듯 나도 꾸물거렸다. 이런 시에 대해 굳이 내가 무언가 글을    있을까. 여기에  보태어 쓴다는  자체가  글을 마주하게  누군가에게는 시를  맛없게 하는 것은 아닐까.


가자, 호락호락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마지막행에서 이마를 탁 쳤다. 아 내가 이 언어와 마주치기 위해 이 시를 읽었구나 했다. 이제는 익숙한 용어가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가 있다. 시는 언어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자동화된, 기존의 인식을 변화시킨다. '호락호락하지 않다'로만 사용하는 일상 언어의 자동화를 파기하고, '호락호락하게' 당당하게 외치는 그의 낯설게 하기는 앞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일상 언어와 대치되면서 더욱 힘을 발휘한다.

  낯설게 하기를 위한 단어를 '호락호락'으로 선택한 것도 감각적이다. '호락호락'은 '忽弱忽弱'으로부터 변형된 단어다. 어원상 정확히 어떻게 풀이될지는 모르겠으나, 소홀하고 약하게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전상 의미는 '일이나 사람이 만만해서 다루기 쉬운 모양'이다. 시인은 나의 '얕'음과 '무너'짐을 '저 감자탕 집'과 '이 세상'이 꿰뚫도록, 가자고 얘기한다. 바로 '호락호락하게'. 나의 약함을 훤히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가자는 그가 마지막에 '호락호락하게'를 추가함으로써 '호락호락'은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당당하게 걷는 모습 같기도 하고, 날 훤히 볼 수 있도록 가슴을 쫙 펴는 모습 같기도 하고, 누군가 나의 얕음과 무너짐을 보더라도 웃어넘길 수 있는 담대함 같기도 하다. '호락호락'을 '-지 않다'라는 부정사와 떼어놓음과 동시에 단호한 '가자,'와 함께 적음으로써 일상에서도 흔히 쓰던 단어가 낯설게 다가오고, 낯설어진 단어는 그 발음과 모양으로 다가와 새로운 의미를 나에게 부여해주고 있었다.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나의 약함을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글을 쓰는 지금도 언제나  결심이 무너지거나, 유혹에 넘어가버리는 약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도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한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 스스로 너무나  알고 있다. 시어로서의 '호락호락' 낯설어진 것과 별개로,  스스로가 '호락호락' 사람임을 아는 나에게 호락호락은 매우 익숙하다. 그런 나에게, 금주를 결정한 바로 그날 소주  병이 공짜라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버리는 '호락호락', 세상이 훤히 꿰뚫도록 '호락호락하게' 가는 이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 오히려, 나는 초심을 꺼내어 품고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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