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황혼> 읽기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黃昏)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人間)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십이성좌(十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鐘)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心腸)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 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來日)도 또 저—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지긴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 이육사, <황혼>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사회적 거리를 둘 수 있을까, 2021년은 마치 그걸 실험하는 한 해 같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세상은 파란빛으로 물들었다. 코로나 블루라는 이름이었다. 개인에 대한 공간적 제약은 무차별적인 연결로 인해 잊고 있던 존재의 고독을 심화시켰다. 망망대해의 푸른 바다에서 제각기 떨어져 각자의 흰색을 깨닫는 갈매기들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당시 푸른 커튼을 최대로 즐겼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번아웃, 이별, 장례식과 같은 개인사로 인해 골방에 틀어박혔던 나를 정당화해주었다. 어느 날엔가 내가 썼던 인스타 글에는 "담배를 태울 때 말고는 집 밖을 나서지 않은 지 한 달이 되어간다"라는 기록이 남았다. 그리고 그 기록 이후 약 7개월 정도를 더 두문불출했다. 밥벌이도 하지 않고 밥만 잘 먹었다. 다시 학교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또 5개월 뒤였다. 그동안 나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방은 나 혼자 있기에 완전한 공간이었으며, 홀로 있음은 외로움보다 오히려 충만함을 느끼게 했다. 골방에서도 방 안의 나에게만 오로지 집중하는 오랜 시간이었다.
골방에서 커튼을 걷는 것은 나는 그대로 골방에 위치하지만 지향이 변화된다. 일단 커튼을 걷으려면 창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에는 외로움을 모른다. 마치 처음부터 혼자였던 사람처럼 사방이 막혀 있는 골방이 주는 익숙함과 아늑함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커튼을 걷고 황혼을 맞아들이자 화자는 외로움을 깨닫는다. 골방에서 커튼을 치고 있을 때에는 몰랐던, 바깥에 대한 지향이 오히려 외로움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화자는 골방 속에 있으면서도 철새인 갈매기를 떠올린다. 골방에서 창밖을 바라보게 된 순간 골방에서의 아늑함보다는 외로움을 상기한다. 육사의 데뷔작으로 알려진 이 시는 그렇게 골방 속에 있던 육사가 커튼을 걷고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면서 외로움을 느끼고, 그 외로움을 기반으로 글을 쓰고 그럼으로써 외부 세계로 자신의 이상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첫 포부로서 읽어도 될지도 모르겠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 자체를 커튼을 걷는 행위와 겹쳐보기도 한다.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몇 년 전, 페이스북에서 '외로울수록 쉽게 살찐다.....'라는 코멘트가 달린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영상을 찾아보니 고립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건강을 어떻게 해치게 되는가에 대한 영상이었다. 내가 이 영상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영상 내용 자체보다는 댓글의 반응이었다. '외로운 것도 서러운데 살도 찐다니', '애인이 없어서 내가 살이 찐 거구나', '다이어트를 하려면 애인부터 만들어야 하나봐'와 같은 반응이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애인이 없는 상태를 외로움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듯했다. 그 영상에서는 연애 상태에 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댓글창은 솔로인 친구를 골뱅이(@)와 함께 소환하는 놀이의 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은 '애인이 없음'이라는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고립, 외로움, 고독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은 다르기도 하다. 그래서 화자는 외로움의 다양한 모습을 펼쳐 보인다. 내가 지금 느끼는 외로움의 형태와 다르지만 비슷한 대상들, 의지가지없음으로 퉁쳐지고 있지만 그 원인과 결과가 서로 다른 대상들이 나열된다. 십 이성좌라는 관계성 속에 있지만 사실은 서로 아득히 먼 거리에서 빛을 내고 있는 고독한 별들, 스스로 개별 인간과의 애정 관계를 거부하고 인간애를 실천하고자 저문 산림 속으로 들어간 수녀들, 타의로 인해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시멘트 장판과 벽에 둘러싸인 수인들. 골방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화자는 외로움의 다양한 양상들을 짚어본다.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들과 나누고 싶은 것은 '입술'이다. 황혼이 붉게 타오르는 하늘은 의지가지없는 그들까지도 가득 안아주고 있다. 촉각은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가장 접근성이 떨어지는 방법이다. 그중에서도 입술을 맞추는 것은 타인과의 가장 가까운 거리가 요구된다. 입술 사이의 거리로 친밀도를 계량하는 방법을 제시한 연구도 있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황혼과 손을 잡고, 입술을 맞추고 싶다고 한 화자의 욕망은 황혼 너머로 확장된다. 나처럼 황혼의 품에 안긴 외로운 인간들과 입술을 나누고자 한다. 어쩌면 황혼의 붉은색이 입술의 붉은색을 떠올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황혼은 화자의 밖에 있는 현상이 아니라 화자의 입술 자체가 된다. 내가 이 황혼의 순간에 위로받았듯, 나의 입술을 이 황혼을 보는 다른 이들과도 나누고 싶은 심정이 드러난다.
황혼을 매개로 스킨십을 시도하니, 이제 화자의 상상력은 계속해서 뻗어나갈 수 있게 된다. 하늘의 별까지도 닿을 수 있고, 종소리가 저물 정도로 깊은 산속까지도 닿을 수 있고, 감옥까지도 닿을 수 있다. 그뿐일까, 고비 사막과 아프리카 녹음까지 내가 살면서 닿지 못했고 겪지 못했던 이국적인 풍경까지도 황혼은 닿을 것이다. (시차에 대해서는 슬쩍 눈 감아 주기로 하자.) 그렇다면 황혼에 내 입술을 실어, 그들과도 입을 맞추자. 나의 외로움과 그들의 외로움을 동시에 달랜다는 의미에서, 육사의 시는 다분히 타자 지향적이다. 아니 오히려, 타자를 지향함으로써 나까지도 완전해지는 것으로서 입맞춤을 떠올려 본다면 봉사나 인류애보다 더욱 강렬한 타자 지향의 의지로 읽히기도 한다.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그런데 화자는 나의 타는 입술을 '지구의 반쪽만'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 구절은 당시 전 지구적인 식민통치 체제에서 지배세력과 피지배 세력으로 지구를 반 나누었을 때, 피지배 세력들을 '반쪽만'이라고 표현했으리라고 많이 해석이 되는 것 같다. 이런 해석을 생각해 보면 골방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된 화자는 어쩌면 인간의 외로움을 단순히 존재의 고독의 측면이 아니라, 억압의 측면으로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골방에 나를 집어넣는 억압의 주체가 실재하는가는 중요치 않다. 골방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억압된 상황을 우리는 이제 이해한다. 바이러스로부터의 생존을 위해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는 억압의 순간에 느끼는 고독을 우리는 안다. 외로움에서 억압으로 이어지는 발상을 2022년 지금,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가는 와중에 드디어 나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만 같다.
억압된 사람들, 혹은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해결을 골방에서 커튼을 걷는 화자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황혼의 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라는 조건을 내건다. 당신들의 고통과 고독을 내가 압니다. 내가 황혼을 바라보며 느끼는 위안이라도 당신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고통과 고독도 함께 나눕시다. 이런 메시지를 자신의 타는 입술에 담아 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황혼이 빨갛게 타듯, 나의 입술도 그 열망으로, 더 나아가자면 어쩌면 억압하는 반대쪽의 반쪽들에 대한 분노로 물들고 있는지 모른다.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하늘을 불태우는 찰나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늑한 골방이다. 타자를 향한 애정도, 세계에 대한 분노도 없이 혼자 오롯이 있을 수 있다. 황혼이 지는 시간은 화자의 애정과 분노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늘을 온통 물들이고 나서 사라지는 태양은 마치 다시는 안 돌아올 것만 같다. 고요한 가운데서만 들을 수 있는 시냇물 소리처럼 묵묵히 황혼은 사라진다. 한 번 흘러가고 나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시냇물처럼 황혼은 흘러가 버린다. 그러면 화자도 아늑한 골방으로 돌아온다. 커튼을 다시 쳤는지는 중요치 않을 것이다. 이미 커튼을 치지 않아도 온 세상은 어둡다. 한번 식고 나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도 든다. 그래서 더욱 황혼의 시간은 가치 있는 시간이 된다. 단순히 해가 떠 있는 시간보다도 더 절망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해가 지는 시간에, 온 하늘을 붉게 물들임으로써 온 세상을 품에 안아주는 황혼에 주목하는 것 또한 그 가치를 심화시킨다.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는 '내일도'를 찾는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말은 희망적인 표어로 자주 활용된다. 한때 내일도 해가 뜬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천체의 운동을 알지 못하던 아주 어릴 때였던 것 같다. 햇님이 내일은 힘들어서 못 나오면 어쩌지, 하는 고민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거라고 알려주셨다. 그래서 내일은 희망이라고. 오늘의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새로운 하루가 오는 것이라고. 수학적 귀납법에 따르면 아내가 어제도 피부가 깨끗했고 오늘도 피부가 깨끗했으니 평생 깨끗한 것이라고 설명한 한 공대 출신 남편의 설명처럼, 우리는 귀납법에 의지해 내일도, 아니 앞으로 계속 해가 뜰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시의 화자도 황혼에게 '내일도' 이런 교감과 분노와 사랑의 시간을 기약한다. 그래서 황혼이 식어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골방의 커튼을 계속해서 걷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는 황혼에게 내일을 기약하는 것. 그런데 해가 뜨는 순간이 아닌 해가 지는 순간에 주목하는 것. 골방, 외로움, 사라짐과 같은 절망의 장면들을 커튼, 입술, 내일이라는 희망의 장면들로 바꾸어내는 언어적 전회가 선사하는 위로. 내일도 해가 뜬다는 말보다 내일도 해가 진다는 말이 더 큰 위로가 됨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