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마리코의 <눈보라> 읽기
1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저 사람 역시 지금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릎보다 높이 쌓인 눈. 사람이 가까스로 빠져나갈 만한 좁다란 길 양쪽에서 나와 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걸어가는 거다. 사람들은 언제 맞스치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시작됐는가? 하여튼 둘은 서로 다가간다. 지상에 단 둘이만 남겨져버린 것처럼 마침내 마주친 그 순간, 한 사람이 빠져나가는 동안 또 한 사람은 한편으로 몸을 비키며 멈추어 서서 길을 양보한다. 그때 둘이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것이 내 고향 설국의 오래된 습관이다.
“눈보라 속 저 멀리서 사람이 걸어온다.” 그것을 인정했을 때부터 이미 맞스치기는 시작된 것이다. 누가 먼저 길을 양보하느냐는 그때가 와야 알 수가 있다.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눈보라 속 멀리서 걸어오는 조선의 모습을 만났다.
아직도 같은 눈보라 속을 다니고 있다.
2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먼저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눈송이를 하나씩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 하고 그 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로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 야단 맞을 때까지 열중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 사이토 마리코, <눈보라>
눈보라 속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온다
나와 그 사람은 눈보라 속에 있다. 시인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여기서 저쪽은 아마 일본어의 '向こう'(저쪽, 맞은편, 건너편)일 것이다. '向こう'의 번역어로 눈보라의 '맞은편'을 선택하지 않고 '저쪽'을 선택한 시인의 언어감각에 대해 생각한다. 한국어의 '저'는 화자와 청자 모두로부터 멀리 있으면서도 화자에게 알려져 있는 대상을 지시할 때 사용되는데, 그렇다면 '저쪽'은 화자로부터 거리가 있으면서 이미 화자에게 인식되기 시작된 곳이다. 서로의 저쪽에 있는 두 사람, 이미 '저쪽'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두 사람의 스침, 아니 나아가 서로를 스치는 맞스치기는 시작되었으리라. 단순히 눈보라의 맞은편 혹은 건너편이 아니라, 내가 인식하기 시작한 나에게 이미 알려진 대상이 있는 '저쪽'. 거기서 사람이 걸어온다.
사람들은 언제 맞스치기 시작하는 것일까?
사이토 마리코의 <눈보라>는 시집 <<입국>>에 수록된 시이다. 사이토 마리코는 1991년부터 1992년에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어로 시를 썼다. 그리고 이 시집은 2018년 봄날의책에서 <<단 하나의 눈송이>>로 재출간되었다. 시인은 53편의 수록 시 중에 14편은 일본어로 쓴 뒤 한국어로 번역했지만, 나머지 시편들은 한국어로 생각하고 바로 한국어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첫 출간됐을 당시 시집의 표제시인 <입국>은 일본어로 쓴 뒤 번역한 시지만, 재출간된 시집의 표제시인 <눈보라>(제목 그대로 표제시가 되지는 않았지만)는 한국어로 생각하고 쓴 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맞스치다'와 같은 어쩐지 낯선 단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본어는 동사와 동사의 결합 표현인 복합 동사의 자유도가 아주 높은 언어라고 한다. 물론 '맞스치다'를 한국어 문법으로 분석하자면 접사 '맞-'과 동사 '스치다'의 결합으로 서로 마주하여 스친다는 뜻의 파생어로 볼 수 있지만, 이렇게 결합하는 단어를 한국어 화자의 직관으로는 쉽게 생각하기 어렵지만 복합 동사의 자유도가 높고 사용빈도도 높은 일본어 화자의 직관에서는 자연스럽게 떠오른 조어일지 모른다.
학회에 참가해서 여러 발표들을 듣다 보면, 외국인 학생들의 한국어 사용 오류를 분석한 연구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면 '오류'로서 분석된 사례들 중에서 이렇듯 한국인의 직관에서 보기에는 이상한 단어 사용이나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모국어의 언어감각과 한국어가 충돌할 때 많이 일어나는 듯했다. 한 사람의 언어 처리 과정 속에서 맞스치는 두 개의 언어 감각. 그것은 언어교육에서는 오류 양상이지만, 시에 와서는 심미적 언어로 재탄생한다. <눈보라>에서도 그렇다. '맞'은 '서로 똑바로 향하여'를 뜻하는 '마주'의 접사 형태이고, '스치다'는 '서로 살짝 닿으며 지나가다'를 뜻하는 동사라는 점에서 두 단어 모두에 '서로'가 중복해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를 '역전앞', '약수물'과 같은 겹말의 오류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눈보라 속에서 눈이 높게 쌓여 아주 좁은 길이 만들어졌을 때, 두 사람이 스치면서 지나갈 수밖에 없는 좁은 길의 양쪽에서 서로를 인지했을 때. 결국 '맞스치다'는 동사인 스치다의 의미보다, 서로 똑바로 향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너무 적절하게 나타내어주는 단어가 된다.
지상에 단 둘이만 남겨져버린 것처럼 마침내 마주친 그 순간
맞스치기 시작한 두 사람은 다가가고, 마침내 마주친 그 순간에 지상에는 단 둘만 남겨진 것 같다. 운전을 처음 하던 당시에 나는 골목길 안쪽에 있는 한 오피스텔에 살았었다. 주정차 금지 표지판이 무색하게 양쪽에 늘어선 주차된 차들, 그 사이를 비집고 나가다 말고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만났을 때. 아, 그때만큼은 정말 이 넓은 서울 속에 그 차와 나 둘만이 남겨져버린 것만 같다. 지상에 둘만 남겨진 것 같다는 것은 그런 막막함과 서로의 지나갈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집중하고 있는 그 감각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그럴 때면 많은 차들은 초보운전 스티커를 차 앞뒤 유리에 붙여둔 나를 위해 깜빡이를 켜고 후진을 하고는, 그 자리에 멈추어 내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야 움직였다. 따뜻하게 양보받았던 순간들.
당시에 나는 그럴 때에 누가 비켜주어야 하는지 교통법에서 정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누가 먼저 양보하느냐는 결국 마침내라는 그 순간이 와야 알 수가 있다. 다음번에 내가 골목길에서 다른 차를 만나면, 그때가 되어야 내가 비켜설지 상대가 비켜설지 알 수 있으리라. 그런 불확정적인 맞스치기는 결국 저쪽에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인식한 그 순간부터 시작되지만, 행위로 나타나는 건 코앞에서 서로를 맞닦뜨리는 바로 그 순간의 융통성이다.
화자는 그런 식으로 조선의 모습을 만나고 있다. 이미 화자와 조선의 맞스치기는 시작되었으나, 마침내 마주쳤을 때 누가 멈춰 서서 길을 양보하게 될지 어떤 인사를 건네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태. 결국 '눈보라'는 화자와 조선이 만나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면서도, 어느 한쪽이 멈춰 서서 양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게 되면 그 양보한 쪽이 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양보하고,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둘 모두가 그 좁은 길을 지나갈 수 있게 된다. 아, 시인의 맞스치는 언어 감각들이 빚어낸 새로운 한국어 표현들은 결국 그 양보의 결과이리라. 그렇게 되면, 누가 양보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어차피 누가 먼저 양보하느냐는 그때의 순간적인 선택일 뿐, 맞스치기는 멀리서 걸어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
2에서는 새로운 장면이 나타난다. 내기를 하는 두 학생. 그 내기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이다.'라고 말하고 그 내용을 후술하고 있다. '그것'이라는 지시어를 '이런 식'이라는 지시어로 설명하는 텅 빈 문장. 이 문장은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을 이어주는 기능 외에는 아무 의미 기능이 없지만, 이 문장의 질량이 시에 자리잡고 있음으로써 시의 언어는 풍부해진다. '그것'은 화자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지칭하지만 '이런'은 지금 가까운 대상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마치 과거에 했던 내기를 지금 소환하기 위한 의식 같기도 하다.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이번엔 눈보라 속 단 하나의 눈송이를 끝까지 좇는 모습이 나온다. 1에서 눈보라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반대편 사람을 이야기한다면, 2에서는 눈보라 속에서 운명적으로 내가 선택한 그 눈송이. 그 눈송이를 땅에 닿을 때까지 끝까지 추적하는 내기이다. 우연과 운명의 차이점과 관련성 같은 진부한 얘기는 여기서는 생략하자. 그 눈송이를 계속해서 내가 제대로 쫓고 있는 것이 맞을까. 화자와 친구는 서로의 눈송이가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그 눈송이를 쫓아간다.
함께하고 있음에도, 그 이전에 오랜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각자가 쫓고 있는 눈송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두 사람. 오랜만에 대구에 내려갔던 날에 나는 엄마에게서 초록빛이 나는 어두운 점퍼를 받아왔다. 남자친구에게 약간 초록빛이 나는 점퍼라고 말하고 며칠 뒤 그 옷을 입고 남자친구를 만났다. 남자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게 어딜 봐서 초록빛이냐고, 그냥 검은색이지 않느냐고. 결국 결론은 나지 못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강아지가 보는 세상은 흑백이고, 곤충이 보는 세상은 형광색이라는 어린 시절 과학 이야기 같은 것을 떠올렸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각자의 눈송이를 쫓으면서, 서로의 눈송이에 대해 얘기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걸 만남이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서로의 눈송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누가 이기고 졌는지는 알 수 있는 그 내기 자체가 모든 존재와 관계에 대한 커다란 비유인 것이다.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아직도
화자는 한때와 아직도를 활용해 과거를 현재로 연장시킨다. 이 시는 일화를 제시하고, 그 일화를 '한때'의 나에 대한 비유로써 활용하고, '아직도' 그 비유가 유효하다는 일반화로 이루어져 있다. 일화의 제시-인생에의 비유-일반화라는 구조의 두 번 반복. 사실 이건 속담과 고사성어에서부터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단순한 비유의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전혀 단순하게 읽히지 않는 것은, 이런 식으로 맞스치는 시인의 언어 감각 때문이 아닐까. 그의 고향 설국의 습관과 어린 시절의 습관이 공간과 시간의 거리가 있더라도 그의 시에 나타나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충돌지점들은 2020년대의 대한민국의 내가 종종 이 시를 꺼내어 읽어보게 하는 이유가 된다. 시의 언어를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그 시인이 쫓는 눈송이가 무엇일지 궁금해하면서도 나의 눈송이를 끝까지 쫓는 일과도 같다. 그래서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시를 읽고, 아직도 눈보라 속에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