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ese tallow tree
2020년 12월 칭다오에 큰 눈이 내린 날, 눈 덮인 겨울 식물들을 보고 싶어 평소 내가 자주 가는 집 근처의 세기공원(世纪公园)에 간 적이 있다.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공원의 풍경은 너무나 근사했다.
밤새 내린 눈과 추운 날씨 탓에 공원엔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 눈 위를 내딛는 나의 둔탁한 걸음 소리와 내가 지나온 자리에 고스란히 새겨진 발자국 흔적이 괜스레 미안하게 느껴질 즈음, 새하얀 눈 속에서 더 하얗게 빛나는 무언가가 내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하얀 씨들이 드러난 오구나무 열매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보는 사이 처음 내 시선을 사로잡은 빛나는 열매는 내 마음까지 가득 채워 그 순간 나는 이미 머릿속에 이 나무를 그리고 있었다.
눈 내린 겨울날의 오구나무를 만나기 전까지는 단풍이 물든 오구나무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외의 다른 모습들은 주의 깊게 살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산책할 때마다 지켜본 오구나무는 생각보다 굉장히 느긋한 식물이었다. 다른 나무들이 이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갈 6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잎이 무성해지고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때까지도 여전히 지난겨울의 열매들을 가지 끝에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비록 눈부시게 빛나던 새하얀 씨앗들은 색이 바래 잿빛이 되었지만 초록의 새잎과 묵은 가지와 푸른 하늘의 조화가 꽤나 멋지게 느껴졌다.
6월 말이 되니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눈 덮인 겨울의 열매를 만나고 한눈에 반했을 때는 무작정 좋기만 했지만, 후에 도감을 읽으며 대극과 식물인 것을 보고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마주한 오구나무의 꽃은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꽃이 적당히 피기를 기다려 예쁜 잎과 꽃을 스케치북에 기록해 두었다.
내가 구상한 그림은 가을의 모습을 중심으로 그릴 예정이기 때문에 지금 모습으로 전체 구도를 잡을 수 없지만, 이렇게 그때그때의 모습을 스케치해 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혼란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보던 꽃차례에는 수꽃으로 보이는 꽃들이 주로 길게 늘어져 달려 있었는데, 이 꽃들을 관찰한 후 일주일에서 열흘쯤 지나고 나니 처음 피었던 꽃들과 달리 암꽃과 수꽃이 분명히 보이는 꽃차례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해만 관찰한 거라 일반화시킬 수 없고 정확한 건 지 사실 잘 모르겠는데, 다만 내가 관찰한 바로는 수술이 대부분인 비교적 길쭉한 꽃들이 먼저 피기 시작했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암꽃과 수술이 분명한 좀 짧은 꽃차례의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존에 그렸던 꽃 옆에 약간의 다른 모양새를 한 꽃도 함께 그려 넣었다.
여름이 가을로 변해가는 동안 나무는 특별한 변화 없이 그저 열매 색만 조금씩 짙어지며 점점 흑색으로 변해갔다.
사실 전혀 변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오구나무는 키가 워낙 커서 하늘과 가까이 있는 잎들은 이미 예쁜 색으로 물들어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내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높이가 전혀 아니었다. 떨어지는 낙엽을 주워 보며 스케치해 두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던 중 가을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입을 굳게 닫고 있던 열매가 드디어 세 갈래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겨울 내가 반했던 그 뽀얀 씨앗들이 살짝 얼굴을 드러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씨앗들의 색도 아주 새하얀 것부터 상아색, 그리고 약간 베이지색이 도는 것까지 열매마다 조금씩 달랐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너무나 간단하다.
미리 점찍어 두었던 마음에 드는 가지를 스케치하고, 계획했던 대로 그저 열심히 작업하면 된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주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래서 지금도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을 놔두고 굳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집 앞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오구나무는 보여주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아서 메인이 되는 가을의 모습을 위쪽에 배치하고, 그 외 꽃과 열매 세부도 등은 아래쪽에 그려 넣기로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가을이 오기 전 내가 마음속으로 계획했던 그림은 훨씬 더 노랗고 빨갛게 물든 예쁜 가지의 모습이었으나, 내 눈높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올해의 오구나무 모습 중에는 이게 최선이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여름에 관찰하고 스케치했던 오구나무 꽃들도 하나씩 그려나갔다.
늘 시작하기 전에는 이걸 어떻게 그릴까 걱정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또 끝이 난다.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오구나무 꽃도 차근차근 그리다 보니 어느새 완성이다.
이제 드디어 마지막 단추를 끼우는 순간이다. 열매가 자라는 모습과 지난해의 묵은 열매까지 모두 그리고 나니 다시 겨울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겨울에는 작년 겨울에 본 것만큼 멋진 오구나무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아쉽기도 하지만, 그것이 내가 간직한 2020년 겨울의 기억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 것 같다.
지금껏 보타니컬아트를 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중 하나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나였어도 그 점이 매우 궁금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그 질문만큼은 명확하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나는 2020년 12월에 이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고 그때부터 계속 관찰하고 그 사이 다른 그림들도 그리며, 실제 이 그림을 시작한 것은 2021년 11월이었고 한 달 정도 걸려 12월에 완성했다. 난 이 그림을 얼마 만에 완성한 걸까? 한 달 걸렸다고 대답하기엔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부터 여기에 쏟아부은 시간과 정성이 좀 많아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글을 읽는 분들이 각자 적당히, 적어도 한 달보다는 좀 길게 판단해 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