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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박자 Oct 11. 2023

션에게 쓰는 편지1

2023.09.12.

귀한 내 아들 션.

하루 종일 바쁘고 복잡했던 마음을 핑계로 또 네 영어단어 암기숙제를 짜증스레 봐주고, 서운이 채 풀리지 않은채 잠든 네 모습을 뒤늦게 가만히 바라보포옥 감싸 안아보는 못난 엄마야.


오늘은 분당 할아버지가 항암치료를 시작하신 날이야.

지난 8월 11일, 갑자기 발견된 커다란 종양을 제거하는 뇌수술을 받게 되신지 이제 겨우 한달 밖에 안됐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어..


우리 곁에서, 널 특히 예뻐하고 보고 싶어하고 안아주고 놀아주시던, 그 분당 할아버지가 이제 그때 그 분이 아닌거야.

처음 수술 직후에는 왜인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어서 너무 마음을 놓았던 거 같아. 수술이 잘되었고 크게 달라지신 것 같지 않고 이제 항암도 의지를 갖고 잘 해내실테니.. 하며 너무 좋게만 생각했었나봐.

응급실에서부터.. 오롯이 혼자 감당하며 점점 지쳐가는 분당 할머니의 호소를 들으면서도, 응원 말고는 더 보낼 것이 없다 생각했던 엄마는 아직도 경험치가 부족하고 철이 없었나봐.


지난 주말에 우리 가족이 꼬리곰탕 사들고 할아버지 뵈러 갔을 때 할아버지 어떠셨어? 너무 마르고 기력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분당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 적었지? 잘 웃지도 말씀하시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몽롱히 계시던 모습..

 

그러고 다녀와서 어제 분당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는데, 인지가 매일매일 너무 떨어져서 이젠 방향이고 뭐고 분간을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더라..

그제야 정말 우리가 알던 션의 할아버지를, 원래 그 모습을 다시 뵐 수 없는건가.. 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연의 순리대로 싹 트고 꽃 피고 열매 맺고 시들고 지는 거라지만, 그걸 요즘 실제 피부로 느끼니 엄마는 참 마음이 아프고 슬프더라..


우리 션도 마음이 따뜻하고 공감을 잘하니 이 슬픔이 뭔지 알겠지?널 예뻐하셨고, 사랑해주셨고, 보고 싶다며 갑자기 유치원에 찾아오기도 하셨고, 자전거 킥보드 태워 탄천에 나가 놀아주셨고.. 그렇게 수많은 추억을 나누었던 할아버지가 이렇게 변해가시는 걸 알면 너도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겠지?..


오늘 좀 일찍 퇴근하고 할아버지 항암치료 입원수속에 따라갔다 오신 네 아빠도 눈이 터질듯 부르퉁퉁 울었더라.

말했었지? 네 아빠를 낳아주신 분, 네 친할머니도 아빠 아직 23~4살일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이제 할아버지마저 아프시고 예전의 모습을 잃어가시고 언젠가 멀리 여행도 떠나시면.. 아빠는 얼마나 아프고 슬플까?..


음..  엄마아빠가 그동안 지독하게 사랑싸움? 같지 않은 미숙한 싸움들로 너흴 불안하게 하기도 하고, 나쁜 말 행동들 보이기도 하고 그랬잖아..

근데 션, 사실은 그래도 엄마아빠는 운명같은 사람들이다? 돌아가신 네 친할머니가 맺어주신게 아닐까 생각할 만큼 애정과 친밀과 의지됨의 깊이는.. 서로가 아니면 다시 없을? 그런 사이야. 하하..몰랐지...?;;


이 말을 갑자기 왜 하냐면, 엄마는 앞으로 더욱 그런 존재로 네 아빠를 지킬 거라고 말하는 거야.

네 아빠가 할아버지를 여행 보내드려도, 절대 세상에 혼자 외로운 사람이지 않게, 엄마가 너희들이랑 같이 아빠 곁과 마음을 지킬거야..

션도 아빠한테 함부로(엄마한테 배워서.. 미안..) 대하는거 이제라도 안해야겠지?우린 가족이니까. 너와 제이에겐 핏줄이고. 엄마는 아빠랑 피는 안섞였어도 핏줄같은 존재고.


너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자꾸 나서 어찌할까 하다 이렇게 너에게 쓰는, (앞으로 제이에게도 쓰겠지만),  편지글을 브런치에 남겨 기록하기로 했어.


엄마는 지금 이 순간 이라는 말을 좋아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만 하지 않으며 지금 현재를 사는 것. 그게 생즉고*인 삶을 견뎌내고 소소하게나마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인 것 같아서 그래.


그때, 너희 할아버지와 아빠와 션과 제이가 탄천에서 자전거 킥보드 타고 놀며 산책할 때, 엄마가 뒤에서 그리움을 담아 찍은 사진을 첨부해.


참. 언젠가 엄마도.. 너희의 곁을 각자의 배우자.자녀들에게 맡기고.. 먼 여행가는 날이 올테니까.. 미리 조바심에 말해둘게.

엄마는 거의 모든 순간을(너한테 함부로 말하며 혼내던 정신나간 순간은 빼고..ㅠ미안) 저 사진처럼 온 마음을 다해서 느끼며 살아온 거 같아. 그렇게 해도 나중에 아쉽고 그리울 순간들이라서.. 그때그때 한없이 가득 가슴에 담고 싶더라구..


사진보며 엄마는 한참을 울었네. 그때 엄마가 저 사진을 찍을 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었거든.. 언젠가 이 사진 속의 누군가가 떠나갈 때가 다가오면.. 이 사진을 찍던 순간이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라는 것을 말야...


너무 슬픈 편지네. 미안해 아들. 엄마의 오늘 하루를 일기처럼 편지처럼 정리하며 남겨봤어.

우리 션, 엄마가 사랑해. 네 동생 째째 아니 제이도 사랑하고 네 아빠도 사랑해.


마음 아프고 슬픈 지금도,

우리 가족, 지금을 살자.


읽어줘서 고마워. 잘자 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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