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빨리 돌아오세요.
요 며칠 엄마는 출장 중이다. 엄마는 종종 컨퍼런스에 무슨 발표를 하러 간다고 한 삼사일에서 일주일간 집을 비울 때가 있다. 나는 엄마가 집을 비울 때가 제일 싫다. 엄마가 안전하게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나의 맘은 여러 가지 이유로 어지간히 복잡하다. 엄마가 해외에서 안전한지 걱정이 된다. 집안 식구들 말수가 줄고 분위기가 냉랭해서 기분은 다운된다.
엄마가 없는 집안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형도 누나도 풀이 죽어 있는 것 같고 아빠의 목소리는 왠지 통명스럽게 들린다. 안 그래도 말이 없는 아빠는 엄마가 없으면 더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한 마디 툭 던지면 잔뜩 화난 사람처럼 들린다. 아빠는 이상하게 엄마가 없으면 제일 나이 어린 형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주문이 많아진다. 내가 봐도 아빠가 누나만 편애하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아빠는 형에게 남자는 자고로 뭐든 잘해야 한다. 그리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해야 한다면서 잔 심부름을 시키거나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형을 구박한다.
며칠 전에는 형에게 설거지를 해놓으라고 시켜놓고 아빠는 골프를 치러 나갔다. 나는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형은 키가 작아서 싱크대에 손이 제대로 닿지도 않는다. 키가 훨씬 큰 누나를 두고 왜 쬐끔한 형에게 설거지를 하라고 하는지 난 도대체 아빠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형의 손은 아직도 고사리 손처럼 작고 포동포동하다. 그 귀여운 손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형을 대신해 내가 다 해버리고 싶었다. 형은 툴툴거리며 자기 몸보다도 두 배나 커 보이는 앞치마를 둘렀다. 그리고 수툴 위로 올라가서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형의 손 몇 배나 더 큰 접시를 들고 닦을 때면 짠한 마음마저 들었다. 아빠의 속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 우리 아빠는 남자보다 여자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아빠는 우리 집에서 일 번으로 엄마를 좋아하고 그다음으로는 누나를 좋아한다. 그리고 형은 마지막인 것 같다. 나도 남자라서 아빠가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한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오 마이 갓!
마지막으로 옮기던 유리컵 두 개가 형의 손에서 동시에 미끄러져 나갔다. 형은 큰 소리로 누나를 불렀다. 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반은 울먹이고 반은 놀란 목소리였다. 순간 형은 스툴 위에서 쭈그렸다. 나도 놀라서 내 꼬리가 어느새 위로 쭉 올라감을 느꼈다. 혹시라도 형이 다쳤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형은 스툴 위에 있어서 유리 파편들이 형의 맨발에 닿지 않았다. 참 다행이었다. 이럴 때 엄마가 있었다면 모든 것을 매끄럽게 해결해 주었을 텐데. 엄마가 있었으면 아빠가 형에게 설거지를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아빠는 비겁하다. 엄마만 없으면 남자는 어쩌고저쩌고 해야 한다면서 형을 괴롭히니 말이다.
위층에 있는 누나가 쿵쾅거리며 내려왔다. 먼저 형에게 다친 데는 없냐고 묻고 형에게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 누나가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누나는 형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을 몰랐나 보다. 아무튼 누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형과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누나는 유리 조각을 담아서 휴지통에 버리자고 했지만 형은 유리컵을 깬 사실을 아빠에게 들키면 혼날 수 있다며 유리 조각들을 키친타월에 담아서 자기 방에 숨기겠다고 했다. 누나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형이 혼나길 원치 않았는지 동생의 계획에 동조하는 듯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깨진 유리컵 조각들을 키친타월로 싸고 또 쌌다. 내가 보기에 키친타월 한 통은 거의 다 쓴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형은 그 뭉치를 조심히 안아서 본인 옷장 안에 숨겼다. 그리고 나서야 안도가 되었는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었다.
나는 옛날에는 조용히 혼자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었는데 이제는 우리 집이 조용하면 적응이 안 된다. 오늘 밤 엄마의 귀찮은 수다가 그립다. 엄마와 밤마다 코로 나누는 굿나이트 키스도 그립고 내 배를 쓰다듬고 문질러 주다 가끔씩 내 배를 콕 찌르며 장난치는 엄마의 손길도 그립다. 내가 엄마 얼굴을 만지면 내 앞발을 턱으로 걸고 내 발을 못 움직이게 하는 엄마. 그리고 시치미를 뚝 떼고 다른 데를 보는 개구쟁이 울 엄마.
엄마가 출장에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발표 건 뭐건 나는 엄마가 외국으로 출장 가는 일이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집 앞에 나가서 엄마를 기다려 봤다. 혹시라도 엄마가 예정보다 더 빨리 돌아올 수도 있기에.
PS. 아이들이 어렸을 때 겪었던 사실을 기반으로 적어보았습니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제 아들은 어려서 아빠가 무서웠다네요. 어느 날 아들 방을 청소하다가 깨진 유리잔들이 키친타월에 수도 없이 둘둘 말아진 것을 발견하고는 눈물이 났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엄하게(?) 자녀들을 대하던 것이 당연시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의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제 남편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더 살갑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고 하네요. 그때는 그렇게 키우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건 믿거나 말거나인데요 ㅎㅎㅎ. 제가 집을 비우고 돌아온 날에는 콜튼이 저에게 "야옹 어쩌고저쩌고" 뭐라고 긴 시간 떠들어 댑니다. 마치 그동안 집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고자질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