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각과 조응한 순간의 선율
알렉스 카츠라는 이름은 바로 그의 쿨한 인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거대한 캔버스에 만화 같은 커다란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카츠는 격동의 20세기를 거쳐 현재까지 거의 한 세기를 살며 여전히 매일 작업하고 있는 집념의 화가다. 무엇이든 대상을 앞에 두고 그렸던 그는 평생 주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마주한 꽃과 나무, 풍경을 지속해서 다루었다. 카츠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나무와의 수많은 만남과 인상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고 자유롭게 기록했다.
알렉스 카츠(Alex Katz, 1927~)는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로, 미국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퀸즈에서 자랐다. 맨해튼에 있는 명문 쿠퍼 유니언 미술학교를 다니다가(1946-49) 북동부 메인주에 있는 스코웨건 회화조각학교에서 공부하던 시기(1949-50), 카츠는 결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학구적인 쿠퍼 유니언의 분위기와 다르게 메인의 풍요로운 자연에서의 풍경화 수업은 자유롭고 흥미진진했다. 자연을 오래 관찰하고 빠른 시간 내에 풍경을 완성하는 수업은 집중력과 무의식이 함께 작동되는 과정이었다. 카츠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나의 주제는 물론 내 삶을 회화에 바쳐야 하는 이유를 발견”했으며, 회화에 대한 그때의 드높은 감각을 현재까지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비교적 최근의 작품이지만 <두 그루의 나무>는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여름날 햇살 가득한 숲 속에서 두 나무의 몸통이 바로 눈앞에 있고, 주변에는 잎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반짝인다. 이 그림은 카츠가 선 그때 그곳에 우리를 데려간다. 언뜻 19세기말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한 인상주의(Impressionism)와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뭔가 다른,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미국적인 화가’ 알렉스 카츠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풍경을 비교적 멀리서 조망한 인상파와 다르게 카츠는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듯 원하는 일부를 포착했다. 바탕은 하나의 색면으로 채색되었고, 빠른 붓질에선 에너지가 느껴진다. 사람보다 큰 대형 캔버스에 담긴 풍경은 보는 이를 둘러싸며 압도한다. 무엇보다 강렬한 색채는 자연의 색에 인공적인 느낌이 가미되었다. 이런 카츠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의 스타일이 완성된 196,70년대의 궤적을 살펴봐야 한다.
“다른 작가들은 모두 추상적이기를 원했지만, 나는 사실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사실적인 것에서 출발할 때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사실적인 것이 무엇이지?’라는 질문이 따라오기에.” - 카츠
카츠가 활동을 시작한 1950년대 뉴욕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미술계를 지배했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k, 1912~1956)은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붓을 휘두르며 물감을 떨어뜨렸고,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를 위시한 화가들은 색면을 통해 정신성을 표현했다. 추상이 잘 맞지 않았던 카츠는 일상의 인상을 생생하게 포착하는데 집중했다. 수많은 드로잉을 통해 쉽게 그린 것처럼 보이는 ‘테크닉’을 쌓았고, 점차 형상을 단순화하고 색면으로 묘사하는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이때 카츠는 평생의 반려자이자 뮤즈인 에이다(Ada Kaz, 1928~)를 만난다. 생물학자이자 (카츠의 따르면) ‘아메리칸 뷰티’를 대변하는 그녀는 <빨간 미소>를 포함해 천 여점의 작품에 등장한다.
전후 호황을 맞은 1960년대, 뉴욕 곳곳에서는 텔레비전과 영화, 잡지, 광고 등의 대중 매체가 사람들을 매혹했다. 특히 인물을 보여주는 방식에 흥미를 느꼈던 카츠는 대중매체에서 부분을 통해 강한 인상을 주는 것에 주목했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의 초상에 클로즈업을 시도했고, 압도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받아 점점 더 큰 캔버스를 선택했다. 이는 당시 옥외 광고판(billboards)이나 영화 스크린의 경험도 반영한다. 카츠는 직접 섞어 만든 색채를 사용했는데 바탕은 과감하고 고른 색면으로 깔고, 대상의 세부와 명암을 최소화해 두드러진 특징을 표현하는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카츠의 인물화는 <둥근 언덕>에서와 같이 우아한 맨해튼의 지식인들과 시골의 부유층이 주된 모델로 영화나 광고의 한 장면 같다. 그래서 당시 미국이 지향하는 이상 세계의 평온함과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런 그의 작품은 엄숙한 추상에 반대하며 부상한 팝아트와도 궤를 같이 한다.
“나는 항상 타임 스퀘어에 걸 정도로 강렬한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다.” - 카츠
경력 초반에 카츠는 인물화에 집중하며 여러 형식적인 실험을 이어갔다. 두 개(혹은 여러 개)의 얼굴을 캔버스 하나에 나란히 배치하기도 하고, 합판이나 금속판에 그린 인물의 윤곽을 잘라 평면 조각(cut-outs)을 세우기도 했다. 인물의 크기와 비율을 화폭에서 자유롭게 조정하는 파격적 구성으로 보는 경험이 주는 놀라움과 즐거움, 긴장과 욕망도 보여주었다. 말년에 회화에서 속도와 움직임, 그 순간의 에너지를 담으려는 시도도 돋보인다. 카츠는 대상을 표현하는 자기만의 양식과 개성인 스타일을 가장 중요시했다. 형식적인 여러 실험은 변화하는 자기와 세계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으려는 시도다.
카츠의 스타일이 형성된 1960년대의 작품 <습지의 단풍나무 4:30>는 인물화와 유사한 언어를 보여준다. 3.5m가 넘는 캔버스 중앙에 단풍나무가 전면에 우뚝 서 있다. 배경은 물론 나무도 몇 개의 색면으로 형태가 단순화되었다. 연노랑 빛의 하늘, 멀리 연하늘과 회색의 구릉, 연초록의 습지는 자연의 색과 멀어보인다. 노랑과 올리브색이 섞인 땅에서는 붓질 때문인지 빼곡한 풀이 느껴진다. 인물화처럼 단풍나무의 꼭대기와 아래가 잘린 구성도 눈에 띈다. 상단에 회색 잎들과 대조적으로 하단의 초록 잎들은 햇살에 반짝인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해가 저무는 늦은 오후의 풍경임을 짐작할 수 있다. 카츠는 가끔 제목에 시간을 명시해 그때의 빛과 인상을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엷은 색채와 구성으로 원근이 묘사된 주변 풍경은 화려한 잎을 가진 단풍나무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경력 초반에 집중했던 인물화로 카츠는 1970년대부터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86년 휘트니 미술관에서의 회고전으로 가장 뉴욕적인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1990년대부터 카츠는 꽃과 나무, 풍경화에 더욱 집중하며 순간의 인상과 에너지를 전달하는 형식을 연구했다. 카츠는 70년을 넘게 거의 매일 작업한 데다 작업 속도도 빨라 작품수가 엄청나다. 게다가 인기 있는 작품은 색채나 구성, 크기를 변주하거나 판화로 반복 제작하기도 했다. 나무 그림도 그 수와 스펙트럼이 넓어 계절별로 몇 점의 유화만 선정해 살펴보려고 한다. (나의 감각으로 구분한 것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계절과 시간으로 읽을 수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카츠는 매해 여름을 메인에 있는 ‘노란 집’에서 보낸다. 그래서 메인의 풍요로운 자연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여름의 나무는 초록이 화면을 지배한다. 뉴욕과 다른 메인의 풍부한 빛은 자연에 다채롭고 깊은 색채를 선사했다. 카츠는 인상주의의 희멀건한 빛이 아닌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나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4)의 그림에 깃든 강렬하고 빠른 빛을 사랑했다. 나무의 정확한 외관을 묘사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아니었고, 인식의 즉각적인 순간, 그 섬광(flash), 현재 시제를 담아내는 것이 카츠의 목표였다.
크기가 2.3m, 4.2m에 달하는 1991년 작품은 청명한 여름의 숲으로 보인다. 화면으로 보아 감이 잘 안 오겠지만 그 앞에 서면 햇살이 아른거리는 깊은 숲 속에 들어온 착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회고전(1986) 이후 카츠는 이렇게 벽면을 채울 정도로 큰 ‘환경 풍경화(environmental landscapes)’ 제작에 몰두했다. 관객은 특정 공간, 특정 계절과 시간에 화가가 직관적으로 포착한 순간의 인상과 빛의 세례를 감각할 수 있다. <네 그루의 나무>는 빠른 붓질이 눈길을 끄는데, 그로 인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카츠의 나무 그림은 이렇듯 나무의 일부, 토르소에 해당하는 몸통이나 가지를 초점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제목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어둑한 초록잎과 노란빛의 강물은 이때가 늦은 오후임을 암시한다.
“빛은 내 그림을 통합시킨다. 빛을 제대로 잡아낼 때, 마침내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 카츠
카츠의 가을 나무들을 보면 너무 빨리 가버린 가을을 좀 더 오래 만끽할 수 있다. 특히 2022년의 나무들은 화려한 색면 바탕에 단번에 그은 검은 가지와 붓터치만으로 완성한 나뭇잎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액션 페인팅처럼 생기 넘치는 붓질에선 활기차면서도 애틋한 가을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바람에 나부끼는 잎들은 또한 즉흥적인 재즈의 리듬과 선율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카츠는 스탄 게츠, 마일스 데이비스 등 모던하고 정적인 분위기의 쿨 재즈를 즐겨 들었고, 그의 그림은 ‘쿨 페인팅(cool painting)’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통적인 풍경화는 가까이 다가가 요모조모 살펴보며 감상하지만, 사실 카츠의 그림은 모니터나 핸드폰으로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큰 캔버스의 담긴 풍경에 둘러싸여 온전히 감각해야 한다. 카츠의 말대로 그 안에는 읽어내야 할 어떤 내러티브도 없고 단지 지각(perception)만이 남는다. 아쉬운 데로 쿨 재즈를 틀어놓고 큰 모니터로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쉽게 그린 듯이 보이는 카츠의 그림은 여러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그는 인물화든 풍경화든 사진을 사용하지 않고 대상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최근에는 기억에 의존하기도 한다고 한다.) 풍경화를 그릴 때 카츠는 현장에서 위와 같은 작은 보드에 순간의 인상을 빠르게 담아낸다. 직접적이고 거친 스케치는 오히려 작가의 불완전한 손길이 느껴져서 더 아름다워 보인다. 작업실로 돌아온 화가는 캔버스 크기의 갈색 종이에 이것을 세심하게 드로잉 한 후, 그 밑그림(cartoon)을 캔버스에 붙여 구멍을 뚫고 자국을 남겨 캔버스에 희미한 드로잉을 남긴다. 그 후 카츠가 붓을 들기 시작하면 그림은 몇 시간 안에 완성된다.
2020년 로마에서의 전시된 파란 나무 시리즈는 폐허 같은 공간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https://artviewer.org/alex-katz-at-santandrea-de-scaphis/
카츠만큼 잎들을 모두 떨군 겨울나무의 아름다움을 많이 노래한 화가도 없을 것이다. 잎이라는 옷을 벗고 각자 나무는 고유의 가지를 드러내며 최소의 몸짓으로 긴 겨울을 견뎌낸다. 한편으로 겨우살이는 긴 쉼을 선사한다. 겨울은 나무가 가장 수수하고 솔직해지는 계절이다. 비움으로써 봄의 채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나이테를 더한다. 위의 겨울나무 그림들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나무의 뼈대는 고고한 우아함을, 시련을 견디는 내부의 에너지를, 때론 도시풍경과 어우러져 고독과 쓸쓸함을 전한다.
인생의 겨울 단계에 있지만 카츠는 여전히 매일의 운동과 작업으로 작품을 낳고 있다. 짧은 리서치로 단언할 수 없지만 그는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사람으로 보인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주고 가는 나무처럼, 카츠는 주어진 재능과 에너지를 온전히 활용해 계속해서 창조하고 있으며, 재단을 설립해 젊은 작가들의 컬렉션을 미술관에 기부하는 일도 지속하고 있다.
이제 봄이 오고, 나무마다 자신의 노래를 시작하니 말을 줄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