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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Apr 04. 2024

클로드 모네의 나무

: 빛과 대기의 놀이터


모네의 그림은 눈부시게 밝은 데다 수많은 추앙을 받고 있어서 오히려 눈길이 잘 가지 않았다. 보이는 게 다니 내가 탐험할 부분은 별로 없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도 있었다. 작년에 낯선 곳으로 이사를 오고 추운 집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생애 가장 애타게 봄을 기다렸다. 오랜 이웃과 친구, 특히 매일 다니던 산책길이 그리웠다. 밝디 밝은 모네의 그림으로 수혈을 받아야 했다. 그는 드넓은 야외를 작업실로 삼아 햇살과 바람을 오롯이 맞으며 누구보다 많은 풍경화를 완성한 화가였다. 도시화가 가속화된 19세기 후반, 미술에서 시작된 인상주의를 주도한 이 대가가 표현한 자연, 나무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클로드 모네, <네 그루의 포플러 나무>, 1891년, 캔버스에 유채, 81.9 x 81.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네 그루의 포플러 나무가 정방형의 화면을 가로지른다. 키 큰 나무의 우듬지는 보이지 않고, 가는 몸통은 강물의 반영으로 이어진다. 나뭇잎과 습지의 풀은 예상했던 초록빛이 아니다. 그늘져있는 것일까. 울트라마린과 붉은보라, 초록의 빠른 붓질이 뒤섞여있다. 반면 멀리 밝은 노랑빛 나무에는 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독특한 구성과 오묘한 색채의 강변 풍경은 늦은 오후의 꿈결 같은 인상을 전한다. 이 작품은 모네가 지베르니에서 작업했던 원숙기의 연작 가운데 하나다.




클로드 모네, <루엘 풍경, 르아브르>, 1858년, 캔버스에 유채, 46 x 65cm,  카넨코 미술관, 우크라이나 키이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파리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이사한 서북부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싫어했던 소년은 틈만 나면 바닷가를 탐험하곤 했는데, 이때 햇살과 변덕스러운 날씨를 몸소 경험했던 것은 향후 작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만난 화가 외젠 부댕(1824~1898)은 야외에서 그리는 법을 가르쳐준 첫 스승이었다. 18살 모네가 그린 고향 풍경화 <루엘 풍경, 르아브르>는 자연을 제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도록 이끈 부댕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지적된다.


19살에 파리로 간 모네는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다니며 르느와르(1841~1919) 바지유(1841~1870), 시슬레(1839~1899) 등 향후 인상파 핵심 화가들과 교류한다. 186, 70년대 모네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동시대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특히 동료들과 파리 근교의 숲과 바다, 유원지를 여행하며 자연 풍경을 주로 그렸다. 또한 밝은 색채로 당대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한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도 시도했다. 살롱전에 문을 두드렸던 모네는 바다 풍경화와 인물화로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야심 차게 도전한 대형 작품들은 고배를 마시곤 했다.


클로드 모네, <샤이의 도로>, 1865년, 캔버스에 유채, 43 x 59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빛의 효과에 대한 모네의 관심은 초기작에서부터 나타난다. <샤이의 도로>는 그가 무척 매력을 느꼈던 퐁텐블로 숲으로 가는 길의 풍경이다. 길가에 줄지어선 나무들은 햇살에 따라 연두와 황토, 갈색과 잿빛으로 다채롭게 채색되었다. 나무에 머물렀던 시선은 어느새 눈부신 땅바닥으로 향하고, 풀과 떨어진 잎을 비춘 쨍한 햇살은 보는 이를 몽롱하게 만든다.


모네의 모델이자 애인인 카미유가 1867년 아들 장을 낳고, 몇 년 후 이들은 결혼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동료들에게 자주 손을 벌려야 했지만, 행복한 가정생활은 모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의 발발로 가족은 런던으로 이주했고, 여기서 모네는 18세기 영국의 풍경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존 컨스터블(1776~1837)을 발견한다. 모네는 특히 눈부신 빛과 날씨에 따른 대기의 효과를 생동감 있게 포착한 터너의 혁명적인 풍경화에 큰 영향을 받는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버스에 유채, 48 x 63cm, 마르모탕 미술관, 파리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터를 마련한 1870년대, 모네는 자신만의 언어를 완성해 간다. 1873년 동료 화가들과 무명예술가협회 조직하고, 다음 해 첫 그룹전에 유명한 <인상, 해돋이>를 출품했다. 고향 르아브르의 푸른 바다 위로 떠오른 주홍빛 태양, 바다 위의 배들과 항구의 장비들이 빠른 붓질로 대략 묘사되었다. 해 뜨는 순간의 시각적 인상을 포착한 모네의 그림은 벽지의 스케치만도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조롱조로 그림 제목에서 따온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이 유파의 명칭이 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화하는 찰나의 인상을 포착하고자 했고, 이제 회화는 ‘객관적인 대상의 재현에서 주관적인 인상의 표현’으로 나아가게 된다.  



클로드 모네, <공모양 나무,  아르장퇴유>, 1876년, 캔버스에 유채, 60.3 x 80.2cm, 바르베르니 미술관, 독일 포츠담


아르장퇴유에서 모네는 화사한 초원 풍경과 풍요로운 전원생활, 강변과 철교 등을 그리며 인상주의의 언어를 발전시켰다. 그 가운데 <공모양 나무, 아르장퇴유>는 집과 나무, 강과 수풀이 어우러진 풍경화다. 독특한 공모양의 나무가 주인공이지만, 다양한 색채로 물든 해 질 녘 하늘과 그것이 물에 비친 반영이 더 눈길을 끈다.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았던 모네는 평생 빛의 효과와 물의 반영을 묘사하는데 몰두했다. 장면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은 짧고 활기찬 붓질로 채색되어 바람에 일렁이는 인상을 준다. 아기자기하고 조화로운 풍경은 시골의 평화로운 한 때를 보여준다.


아내 카미유가 병으로 몸져눕고 가세가 점차 기울면서 모네 가족은 1878년 베퇴유로 이사한다. 한때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구매했던 사업가가 파산하고 사라져 버리자 각별한 사이였던 그의 아내 알리스 오슈데와 여섯 아이들도 이곳에서 함께 거주하게 된다. 이듬해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모네와 알리스는 여덟 아이들과 큰 가족을 이룬다. 모네는 이 시기 대기 현상에 더욱 집중했고, 계절과 날씨에 따른 형상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하는 감각을 발전시킨다.   


클로드 모네, <투르빌의 바닷가>, 1881년, 캔버스에 유채, 60 x 81cm, 보스턴 미술관


모네가 여행 중에 그린 <투르빌의 바닷가>에는 단연 돋보이는 나무가 등장한다. 고향 근처 트루빌의 풍경에서 주인공은 바닷가에 홀로 선 나무다. 바다와 하늘은 하나로 스며들었고, 자유분방하고 거친 붓질로 채색된 해안가의 풀들에선 거센 바람이 느껴진다. 중앙의 어린 나무는 계속되는 바다 바람을 견디기 위해 가는 몸통을 사선으로 뻗었다. 홀로 있는 나무는 헤세가 말했듯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고독한 사람 같아 경배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더 오래 눈길이 머물고 먼저 말을 건네게 된다.


여러 곳을 전전하던 모네는 파리 서북부에 위치한 지베르니의 아름다움에 반해 1883년 정착해 남은 여생을 보낸다. 모네는 이곳을 베이스로 계속해서 다른 빛과 풍경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노르망디 에트르타의 절벽(1883-6)과 지상의 낙원 같은 이탈리아의 보르디게라(1884), 네덜란드의 튤립 벌판(1886)과 브르타뉴의 절벽(1886), 앙티브의 바다(1888)와 크뢰즈의 계곡(1889), 런던(1900-4)과 베네치아(1908)까지, 다른 빛과 대기를 포착하기 위한 그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몇몇 장소에서 모네는 같은 장면을 여러 차례 그리는 연작을 실험하기도 했다.


“내 생각엔, 하나의 풍경이란 그것을 둘러싼 대기와 빛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클로드 모네



클로드 모네, <라 살리스에서 본 앙티브 >, 1888년, 73.3 x 92cm, 톨레도 미술관/  65 x 92cm, 개인소장


그 가운데 프랑스 남부의 앙티브 풍경에는 올리브 나무가 전면에 등장한다. 라 살라스 정원에서 바라본 옛 요새 마을은 다른 빛과 색채의 팔레트를 보여준다. 올리브 나무는 옅은 노랑과 초록잿빛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늘과 바다, 멀리 산과 마을도 모두 다른 옷을 입었다. 모네는 지중해의 풍부한 빛과 마법적인 분위기에 감탄하며 파스텔조의 밝은 색을 많이 사용했다. “나는 태양과 펜싱하고 씨름하고 있다네, 엄청난 태양이야! 여기서 그리기 위해서는 금과 보석들이 필요할 걸세.” 모네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에게 보낸 편지에 한 말이다. 매 순간 변화하며 생성되는 자연의 무한한 색채를 물감으로 포착하려는 시도, 모네는 그 불가능에 도전한 것이다.     


1890년 ‘건초더미’를 시작으로 모네는 연작(series) 작업을 본격화한다. 소박한 모양새로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이 연작이 하나의 계시였다면, 고딕 성당의 변화무쌍한 표면을 포착한 이후의 ‘루앙 대성당’ 연작(1892-94)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역작이다. 중간에 작업한 ‘포플러 나무’ 연작(1891)은 솔직히 두 연작에 비하면 다소 감동이 덜한 편이다. 모네는 지베르니 집 근처 엡트강가에 줄지어선 포플러 나무를 여름과 가을에 걸쳐 그렸다. 24점의 연작은 세 장면 그룹으로 나뉘는데, 가장 다채롭게 제작된 그룹을 살펴보자.   



클로드 모네, <햇살 아래 포플러 나무>, 1891년, 캔버스에 유채, 93 x 73.5cm, 서양미술국립미술관, 도쿄 /<흐린 날의 포플러 나무>, 92 x 73cm, 개인소장


클로드 모네, <바람 부는 날, 포플러 나무>, 1901년, 캔버스에 유채, 105 x 74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세 작품은 거의 같은 지점에서 화창한 날과 흐린 날, 바람 부는 날의 풍경을 포착한 것이다. 세로형 캔버스라 포플러나무의 수직성이 강조되었고, 대표 작품처럼 우듬지는 보이지 않는다. 멀리 뒤쪽에는 포플러 나무가 커브를 이루며 줄지어 섰다. 하늘을 보면 날씨와 때를 대략 예상할 수 있다. 나무와 수풀, 강물까지, 그 색채와 (미세하게) 형상도 다 다르다. 화창한 날은 반짝이는 활기로 가득하다. 흐린 날은 풍경을 가장 차분하고 아름답게 채색한다. 가장 좋아하는 바람 부는 날의 장면은 우기의 습기와 살랑이는 바람이 느껴질 정도다. 바람의 효과를 드러내기 위해 모네는 더 큰 캔버스에 나무의 상단을 포함시켰다.


화가는 작은 배를 아틀리에 삼아 여러 캔버스를 두고 빛과 날씨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아래에서 본 시점이라 수평선이 낮고 포플러 나무의 우아한 실루엣이 강조되었다. 민중과 어원이 같은 포플러 나무(populus)는 프랑스혁명 이례로 민중과 자유를 상징하며 새 공화국의 상징으로 심겼다. 모네의 작업이 한창일 때 시에서 나무를 경매로 처분하려고 했는데, 모네는 연작을 완성할 때까지 나무를 베지 않는 조건으로 목재 상인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결국 완성된 연작을 통해 엡트강가 포플러 나무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클로드 모네, <포플러 나무, 가을>, 1891년, 캔버스에 유채, 93 x 74.1cm, 92 x 73cm,  필라델피아 미술관, 개인소장


둘은 가을 풍경이지만 완전히 다른 색채와 분위기다. 구름 하나 없는 청명한 가을날, 눈부신 햇살을 듬뿍 받은 포플러 나무는 파스텔조의 분홍과 노랑빛을 띤다. 반면 구름이 가득 낀 날에 자연은 더 진한 색과 인상을 갖는다. 고유색이라는 것은 관습이 만든 편견의 산물일 뿐, 하루의 때와 계절, 날씨에 따라 대상의 색채, 에너지와 분위기는 매 순간 달라진다. 상식으로 알고 있지만 모네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더욱 정교하게 지각하며 감탄하게 된다.


모네는 야외에서 작품을 완성하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연작은 야외에서 시작되어 오랜 시간 작업실에서 조율되었다. 반복과 차이의 미학을 보여주는 모네의 연작은 전시에서 엄청난 인기와 판매로 이어졌다. 르네상스 이래로 아카데미 미술에서 형태는 색채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모네의 연작을 통해 색채의 효과는 형태의 묘사를 압도하게 되었다. 눈에 충실한 것은 객관성을 추구하지만, 개인의 감각에 기반하는 지각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포플러 나무 연작이 보여주는 율동감과 장식성은 대표 작품에서 보이는 추상화로 이어진다. 모네는 연작에 점차 자신의 느낌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후기작은 표현주의적인 형식으로 진화한다.


“주제는 나에게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대상물과 나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려 한다.”  - 클로드 모네



클로드 모네, <일본 다리와 수련 연못, 지베르니>, 1899년, 89.2 x 93.3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한 이래로 알리스와 정원 가꾸기에 몰두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1893년 토지를 확장해 그림처럼 연못을 만들고 수련과 일본풍의 다리로 꾸몄다. 여섯 명의 정원사와 함께 진귀한 꽃과 나무로 꾸민 정원과 연못은 화가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었다. 모네는 사시사철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이곳에서 행복을 느꼈고, 친구들을 초대해 요리를 즐겼다. 비평계의 주목과 날로 치솟는 인기로 방문자들도 늘었지만, 그는 하나둘 주변 동료들과 가족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게다가 1908년부터 시작된 눈병은 1912년 백내장의 악화로 이어졌고, 모네는 점차 시력을 잃어갔다. 모네는 지베르니의 아름다움을 기록하려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고 작업을 지속했다. 특히 연못의 수련에 집중해 물 위의 수련과 풀, 스쳐가는 하늘과 구름의 인상들을 감동적으로 살려냈다.




클로드 모네, <수양버들>, 1918–9년,  99.7 x 120cm, 킴벨 미술관, 텍사스 포트워스


제1차 세계대전(1914~18) 후 모네는 전사한 군인들을 애도하며 연못가의 수양버들을 그렸다. 수양버들(weeping willow)은 늘어진 모양새가 우는 것 같아서인지 신화에서 애도와 연관되고, 비애와 추도를 꽃말로 한다. 열 점 가운데 위의 <수양버들>은 화면 가득 풍성한 가지를 늘어뜨렸다. 약간의 빛이 깃들었지만 색채는 어둡고 붓질은 더욱 거칠어졌다. 모네는 전쟁 직전에 오랜 동반자 알리스와 두 아들을 떠나보내며 한동안 붓을 들 수 없었다. 전쟁 중엔 집에서 폭격이 들릴 정도의 위험으로 가족과 일꾼들도 떠났지만, 시력을 잃어가는 노화가는 정원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을 택했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을 애도하며 그린 수양버들 그림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낸 그의 슬픔과 아픔이 서려있다. 수양버들의 비틀린 가지와 아우성치듯 늘어진 잎에서 통곡이 들리는 듯하다.   



클로드 모네, <수양버들이 있는 수련 정원>, 1919년, 캔버스에 유채, 200 x 180cm,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파리

수련 연못가에 수양버들 몸통과 늘어진 잎의 일부만 담아낸 이 작품은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다. 흐린 날의 연못 풍경은 선명한 빛을 띠지만 붓질에선 그의 절망과 슬픔이 전해진다. 여러 레이어로 거칠게 채색된 풍경은 초기의 밝고 낙천적인 인상주의 그림들과는 멀어졌다. 오히려 이후 미국에서 등장하는 추상표현주의에 가깝다.


모네는 거대한 파노라마 작업을 위해 1차 세계대전중에 지베르니에 초대형 스튜디오를 짓는다. 높이 2m, 총길이 87m에 달하는 ‘수련 대장식화’(1916~26) 시력이 쇠한 모네가 관찰과 기억에 의존해 10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1918년 프랑스의 승리를 축하하며 국가에 기증된 여덟 점의 작품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두 방의 타원형 벽면을 둘러싸고 있다. 실물 크기여서 관람자는 마치 연못 속에 있는듯한 환영을 경험하고, 때론 무한히 확장되는 연못에서 명상에 잠긴다. 모네는 1923년 두 번의 눈수술로 거의 시력을 잃고, 3년 후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 작업에 헌신했다. 그 가운데 아래 <수련, 아침, 수양버들>은 잔잔하게 빛나는 연못에 늘어진 수양버들잎이 시적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고통과 슬픔을 넘어 놀랍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품고 있다. 모네의 그림은 어떤 존재도 불변하지 않으며, 정적인 나무조차 우주적인 환경 속에서 쉼 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경이로운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클로드 모네, <수련, 아침, 수양버들>, 1916-26년, 캔버스에 유채, 200 x 1275cm,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이미지 출처) https://joinusinfrance.com/episode/orangerie-museum-in-paris-go-or-skip/



“나는 다만, 우주가 나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붓으로 증명해 보이고자 했을 뿐입니다.”  - 말년에 모네가 클레망소에게 보낸 편지(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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