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끊임없이 흐르는 자연의 시계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색채가 있다.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의 짙고 원숙한 초록과는 다른, 환한 빛을 품은 여리여리한 연두. 봄은 삭막했던 겨울 풍경에 하나둘씩 붓질을 더한다. 앙상한 가지는 어느새 기적처럼 환한 옷을 걸친다. 여름으로 가면 초록의 옷은 더 다채로워진다. 매년 어김없이 봄이 오건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풍경은 죽음 후의 부활처럼 감격스럽게 다가온다. 바라봄만으로도 몸에 생기가 차오른다.
한 곳에 40년 넘게 거주하며 같은 나무들이 펼쳐낸 풍경을 그려온 화가가 있다. 역사상 화가들이 이색적인 풍경과 빛을 찾아 도시를 혹은 나라를 떠나곤 했지만, 그녀는 한평생 함께해 온 나무들을 마주하며 그 변화와 성장을 반복해서 기록했다. (위의 작품처럼) 화가는 사진을 찍듯 나무의 일부를 화면 가득 담았고, 주로 여름의 풍성한 초록 나무와 겨울의 앙상한 나무를 그렸다.
실비아 플리맥 맨골드(Sylvia Plimack Mangold, 1938~)는 대공황 시대 뉴욕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여전히 작업하고 있는 화가다. 그녀는 어머니의 권유로 명문 쿠퍼 유니언에 들어갔고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예일대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졸업 후인 1960년대 뉴욕은 미술가의 손길을 최소화한 미니멀리즘과 대중문화 이미지를 활용한 팝아트가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1961년 졸업과 동시에 동료 화가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은 맨골드는 남편처럼 편히 작업실에 갈 수 없었다. 자신의 언어를 찾아 방황하다 결국 한정된 환경에서 눈앞의 것에 집중했다.
맨골드는 특별할 것 없는 뉴욕 아파트의 실내 공간을 그리기 시작했다. 쪽모이 세공 바닥의 나뭇결과 세월의 흔적, 하얀 벽과 코너를 매우 정밀하고 섬세하게 묘사했는데, 이 ‘바닥 그림’은 점차 다양하게 변주된다.
1971년 맨골드는 뉴욕주 북부의 워싱턴빌로 이사해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집과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곳의 강렬한 햇살은 <정오의 바닥>과 같은 작품을 탄생케 했다. 바닥에 드리운 햇살은 보는 이를 고요한 빈 공간으로 초대하며 한참을 머물게 한다. 때론 바닥에 놓인 가지각색의 빨랫감이 가족의 흔적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벽에 세운 거울을 통해 복잡한 공간감과 깊이를 실험한다. 바닥 그림에서 아래를 향한 시선은 집안의 여성이 무심하게 자주 바라보는 관점이라 친숙하다. 다양한 공간의 바닥을 그리면서 맨골드는 학창 시절부터 서툴렀던 원근법과 공간 묘사를 온전히 숙달하고 싶는 기회로 삼았다. 그녀는 관람객이 삼차원의 공간을 유영하다가 표면의 물질로 돌아오기를 바랬다.
1970년대 맨골드는 여러 짜임새와 재료의 바닥을 시도하며 뜬금없이 금속자나 마스킹테이프 등 작업실의 도구를 캔버스에 들여온다. 1976년작 <아버지를 기억하며>에는 초록 리놀륨 바닥에 스테인리스자가 등장한다. 실물처럼 보이는 자는 그림 속 공간과 그림 표면 사이의 긴장과 혼란을 불러온다. 이 작품은 예외적으로 사적인 상징도 내포한다. 자가 끝나는 66 ¾ 인치는 아버지의 생애를 나타낸다. 소실점은 자의 42인치 선상에 위치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화가의 나이이다. 맨골드는 지하실의 낡은 바닥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추모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맨골드는 이제 실내가 아닌 야외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위의 작품처럼 비교적 거리를 두고 시기를 명시하며 풍경을 기록했다. 그리고 작업 중에 그림의 구성을 실험할 때 사용하는 마스킹테이프 모티프가 여전히 등장한다. 왜 마스킹테이프의 흔적이 있을까, 여전히 작업 중인가, 이로 인한 그림 속 풍경(환영)과 캔버스 표면(현실)의 긴장은 마냥 풍경을 향유하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마스킹테이프는 화가가 트롱프뢰유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자연을 다루고 있지만 맨골드의 관심은 여전히 지각과 회화의 본질에 있었다. 리얼리티는 무엇이며 회화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맨골드는 개념적인 요소에 흥미를 느꼈고, 그녀에게 예술은 개인적이면서 표현적이고 추상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화가와 나무의 사이는 더 가까워진다. 마스킹테이프가 사라지고 나무는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1988년 7월>은 여름날 위쪽을 향해 바라본 피나무의 모습을 담고 있다. 수평선이 없어지고 화면을 가득 채운 나무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다. 나뭇잎과 가지는 이전의 ‘바닥 그림’들처럼 세밀하게 묘사되지 않았다. 몸통에서 뻗어나간 가지 하나하나의 흐름이 강조되었고 평면적이지만 자세히 보면 가지들 사이의 공간이 드러난다. 초록잎을 비춘 눈부신 햇살과 움직임도 느껴진다. 자연의 직접적인 경험을 잘 전달하기 위해 맨골드는 인상파 화가들처럼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나무를 가까이서 마주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근접한 나무와 화가의 공간적 긴장은 현대 미술의 아버지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과 독일의 로비스 코린트(Lovis Corinth, 1858~1925)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세잔은 평생 (원근법이 아니라) 자신의 두 눈이 지각하는 대상의 본질적인 구조를 포착하기 위해 고집스럽게 풍경을 그려온 화가다. 코린트는 사실주의에서 인상파, 말년에 표현주의까지 다양한 언어로 많은 나무 풍경을 남겼다. 그의 <떡갈나무>는 풍성한 나무의 상단이 화면을 가득 메웠고, 어둑한 색채와 춤추는 붓질은 표현적인 차원을 드러낸다. 맨골드는 특히 코린트의 밀착된 시선과 구성, 대상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연극성과 물감의 드라마에 매혹되었다. 그녀는 좀 더 섬세한 방식으로 자기만의 나무를 그려나갔다.
1990년대 맨골드는 집과 작업실 주변의 느릅나무와 떡갈나무, 단풍나무 등 개별 나무에 주목한다. 그녀는 매년 같은 나무들을 마주하며 다른 구성과 매체로 기록해 나갔다. 두 작품은 느릅나무 몸통에서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부분을 중심으로 하는 구성이다. 왼쪽의 수채화는 잎을 떨군 느릅나무의 가지가 물의 흐름처럼 표현되었다. 오른쪽의 유화는 여름날 초록 나무의 생기를 전한다. 금세 완성한 듯 보이는 이 작품은 오랜 관찰을 통해 결정적인 붓질과 나뭇잎의 추상적인 표현까지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화가가 경험하는 나무를 더 생생하게 느끼게하기 위해서 맨골드는 정확한 묘사보다 이렇듯 단순하고 추상적인 언어도 적용했다.
맨골드가 판화로 기록한 나무들은 대게 잎을 모두 떨군 겨울의 모습이다. 판화는 드로잉처럼 선적 묘사가 용이해 나뭇가지의 형태와 구조가 잘 표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목표 중에 하나는 “나무의 본성, 그것이 어떻게 자라고 나뭇가지가 어떻게 뻗어나가는 지를” 담아내는 것이었다. 두 작품을 보면 헐벗은 나무는 다른 구조와 분위기를 가졌다. 단풍나무는 단단한 가지를 둥글게 해 하늘로 뻗었다. 떡갈나무 가지는 만세 하듯 사방을 향해 자라는 모양새로 더 자유분방한 매력을 풍긴다. 너무 흔해서 눈여겨보지 않았던 나무의 맨몸은 이렇게나 다르다. 맨골드는 습관적으로 바라보던 방식을 잊고 붓을 메스처럼 들어 절개하고 수선하는 과정을 통해 나무를 조각처럼 구축했다고 말한다.
맨골드가 말년에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나무는 2층 작업실 창문에서 보이는 단풍나무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단풍나무는 다른 모양과 크기의 캔버스에 조금씩 다른 구성으로 등장한다. 나무는 쉬지않고 변하기 때문에 해가 더해지며 그림 속 단풍나무는 미세하게 성장하며 다른 얼굴과 표정을 보여준다. 맨골드의 ‘나무 초상화’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다양한 측면을 담아낸 퍼즐과도 같다.
오랜 기간 한 주제에 몰두하는 작업은 시간과 존재의 본질을 다룬 동시대의 개념 미술가들을 떠오르게 한다. 로만 오팔카(Roman Opalka, 1931~2011)는 1부터 증가하는 숫자로 캔버스를 메우고, 온 카와와(On Kawara, 1932~2014)는 매일의 날짜를 그리면서 시간의 흐름 속에 실존을 증명해 왔다. 맨골드가 다루는 것은 나무, 나무성이지만, 더 넓은 시각에서 작업은 시간의 흐름을 주제로 한다. 현재 나무의 느낌과 질감, 심미적 특성을 물감으로 포착하는 작업은 선승의 반복적 행위나 명상과도 연결된다. 맨골드는 그림을 통해 현재의 시각적 광휘를 찬양하는 동시에 창조의 행위로 지금에 몰입한다.
맨골드의 그림은 나무의 온전한 형태가 아닌 부분을 보여준다. 특히 최근에 자주 다룬 여름의 단풍나무는 더 가까이 다가가 초록잎의 다채로움과 움직임을 제시한다. 화가는 나무의 성장과 움직임에 이끌려 시선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맨골드에게 계속 변하는 그 모습을 포착하는 것은 나무 바닥을 정밀하게 그리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운 과정이었다고 한다. 독특한 시점으로 부분을 포착하는 화가의 관점, 지각의 행위는 이 그림들의 또 다른 주제다. 나뭇가지가 있는 장면에서 관람자는 날파리가 나무 사이를 비행하듯 부피와 공간을 감지하게 된다. 평면적인 오른쪽 장면을 보면 우리도 화가처럼 나무에 얼굴을 바짝 다가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수년간 나무를 바라보며 그릴 수 있었다. 그것은 형태가 각자 비율에 따라 존재하는 방식을 파악하고 그것을 사각형 캔버스에 담아내려는 것과 같다. 당신을 감싸면서도 여전히 열린, 바람이 통하는 야외에 있게 하는 것, 나무가 존재하는 대로 내 그림이 기능하길 원한다.” - 실비아 플리맥 맨골드
맨골드는 나무들을 캔버스에 고이 가두지 않았다. 부분만 볼 수 있지만 캔버스 너머 나무는 뻗어나가고 계속 성장할 것이다. 프리드리히가 광활한 공간 속에 위치한 작은 나무로 무한의 열망을 표현했다면, 맨골드는 일부의 모습을 통해 나무의 성장과 확장의 감각을 전한다. 온전한 모습이 궁금하지만 끝을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맨골드의 겨울나무는 마냥 쓸쓸하지 않다. 그 앙상한 가지에는 곧 여름의 풍성하고 화려한 잎들로 덮일 것이고, 과정이 계속되면서 나무는 자기만의 창조를 이어나갈 것이기에. 한 곳에 고정된 존재의 경험은 마냥 지루한 반복의 연속일까. 맨골드의 그림을 보면 마음과 정신은 어쩌면 자유로운 새들보다 더 확장될 수도 있다.
“나의 근원이자 초점인 자연을 그린 그림... 계속해서 같은 형태를 연구하는 한 곳에서 존재의 이 경험은 반복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상 확장하는 느낌이다.” - 실비아 플리맥 맨골드
안녕하세요? 원래 예수님 성화를 쓰고 있었는데 앞으로 풍경과 나무에 대한 강의를 할 수도 있어서 당분간은 이 주제를 더 깊이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이전보다 글이 좀 천천히 올라갈 거 같아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