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Jan 22. 2024

전직 간호사가 난치병 남편과 여행하면 이렇게 됩니다

한 사람만을 위한 간호사로 살고 있습니다

 약 5년 전, 나는 더이상 간호사는 하지 않겠다며 병원을 뛰쳐나왔다. 간호사 관련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시기라서 나의 퇴사는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여졌고 나는 간호의 '간'도 떠올리지 않고 살고 싶어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간호사 같다는 말이 나오면 싫어했고, 일반 회사원 같다는 말을 들으면 뛸듯이 좋아했다. 그냥 무엇이든 좋으니 간호사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고 간호사와 연관된 무엇도 싫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호와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커서였을까. 몇 년 간 깊이 배어버린 간호사의 모습을 거의 걷어낸 즈음, 도리어 나는 내 간호사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간호사로서의 역량보다는 어떻게든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활용하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남자친구였던 그가 난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가 잘 관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치병을 앓고 있는 남자와 결혼을 해서 함께 한다는 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의료적인 지식이 필요한 일이었다. 단순히 '산다'의 개념이 아닌 '건강하게 산다'의 개념으로 가져가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간호사로서 공부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으며 큰 무리없는 생활이 이어지면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진료 때만 정신을 바짝 차리면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으니까. 문제는 결혼하고 신랑의 난치병도 어느 정도 통증이 조절되는 시기로 접어들었을 때 떠난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예기치 못하게
아픈 순간들이 있다.

 손가락에 상처가 나거나 체하거나 배탈이 나는 등 아주 심한 건 아니지만 약은 꼭 필요할 때. 오히려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는 아픔들이기에 준비한 약은 턱없이 부족한 그런 순간들. 그럴 때면 현지에서 약을 살 수밖에 없고 또 약사님과의 소통이 굉장히 중요해진다. 우리 부부는 언제나 건강 관련 의사소통이 필요할 때면 내가 나선다.



 단순히 내가 간호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약 한 알이 얼마나 무서운지 더 알아서라고 해야 할까. 외국에서 의사한테 약을 처방받을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약국에서 더 예민해지게 된다. 애매하게 말을 했다가는 아무나 먹어도 되는 약을 줄 수 있어서 그렇다. 나는 아무 약이나 먹어도 괜찮지만 신랑은 면역억제제를 먹는 사람이기 때문에 특히나 조심스럽다. 신랑이 앓고 있는 크론병은 단순 소화기관의 병이 아닌 면역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병이다. 일례로 예전에 코로나 확진을 받고 약을 받아온 적이 있었는데, 혹시 몰라 주치의 교수님이 운영하는 밴드에 질문을 한 적 있었다. 교수님은 다른 건 다 먹어도 되지만 항생제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 처음 알았다. 항생제도 안 되는 구나. 그리고 생각했다.



적어도 신랑의 병에 있어서는 쉽게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면 안 되겠다.



 내과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일했기에 약물에 대해서는 그래도 좀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약사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다. 게다가 간호사로 일했던 것도 고작 2년 몇 개월뿐인 간호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신분. 그때 이후로 나는 약에 대해 더 예민해졌고 특히 신랑이 먹고 바르는 약이면 더욱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게 되었다. 덕분에 이번 여행에서의 나는 걱정스러운 상황을 여러 차례 마주해야 했다.



 3년 넘게 크론병 진료를 함께 동행하면서 오히려 크론병에 대한 걱정은 덜했다. 통증의 원인도 명확하게 알 수 있고 통증 조절에는 진통제가 훌륭한 답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물론 진통제를 들이붓는다기보다는 최소한의 용량을 맞춰서 먹되, 통증이 낫기 전까지는 금식 및 수분 공급을 충분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안다. 복부에 핫팩같은 따뜻한 것을 올려주면 더 좋고.





오히려 크론병이 아닌 것들이 문제였다.

 이번 여행에서 신랑은 딱 두 번 아팠다. 먼저 옥수수 쏨땀을 먹고 크론병 염증이 있을 때와 같이 아파했다. 예전에도 옥수수를 먹고 탈이 난 적 있던 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신랑의 크론병 염증에는 옥수수가 영향을 미치는 모양. 사실 그것 때문에 먹지 말라고도 했었지만, 몇 년 전의 일이기도 하고 본인이 너무 먹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서 막지 못했었다. 한 번 아팠던 걸 가지고 먹지 말라고 하기에는 모질다는 생각이 들었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나 아파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앞으로 옥수수는 금지 식품이 될 예정이다. 그래도 이건 우리가 대응책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괜찮았다.



 두 번째는 감기 몸살이었다. 치앙마이에 도착해서 무려 3주가 지난 후였는데도 우리는 영문모를 감기에 걸렸다. 내가 먼저 심한 기침과 함께 고열 감기가 시작되었고 갈수록 심해지는 증상에 가져온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아지지 않고 도리어 설사까지 시작되어 지사제까지 먹게 되었는데. 이러다 여행도 못하고 이도저도 안 되겠다 싶어 약국을 찾았고, 다행히 항생제 처방까지 가능했기에 몸이 나아가던 때였다. 내가 괜찮아지려고 하자 신랑이 덜컥 감기에 걸렸다. 면역력으로 따지면 억제제를 먹는 그가 먼저 걸렸어야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사람이 빨리 낫는 것이니까. 이미 내 몸으로 한 차례 경험을 해버린 나는 초반부터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일주일 가량 버티다 먹었던 약국 약으로.



 운좋게 우리는 좋은 약사님을 만났었다. 당시 머물던 숙소 근처 쇼핑몰에 있던 약국이었는데 구글 리뷰가 좋아서 간 곳이었다. 두 분의 약사님이 운영하시는 약국이었는데, 영어로 의사소통도 잘 될 뿐더러 증상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질문해 주시는 분들이셨다. 감기/설사 증상에 대해서도 워낙 꼼꼼하게 묻고 처방해주시니 믿음이 갔다.



 그 약국에서 신랑의 감기약도 받았다. 감기는 믿을 수 있었지만 내가 긴장한 부분은 바로 지사제였다. 일반적으로 크론병 환자에게 지사제는 금기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열 감기와 동반된 설사이고 이틀을 고생했다면 조금은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져온 약을 먹자니 너무 셀까봐 신뢰가 생긴 약국에 문의해보기로 한 것. 혹시나 잘못 말할까봐 번역기로 잔뜩 준비해 간 결과, 크론병 환자에게도 괜찮을 거라며 주신 지사제를 받았고 약은 효과적이었다. 신랑의 멎어가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복용은 바로 중단했고 그 이후로 문제는 전혀 없었다.



 아무튼 상황은 일단락 됐지만 그래도 걱정은 남아 있었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한들 이 결정이 최선이었을까. 뭐랄까, 아주 적극적인 걱정은 아니지만 약하게나마 불안감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원래는 귀국하고도 2주 후 병원 진료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드라마틱하게도 크론병 약을 넣어둔 캐리어만 항공사에서 분실해버린 관계로 우리는 정말 귀국하자마자 병원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감기로 열나면서 설사했으니 괜찮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여전히 나는 간호사로서의 정체성은 없다. 간호사로 일하지 않은지도 너무나 오래 되었고 앞으로도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생각은 1도 없기 때문. 그러나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건강 문제가 생겼을 때, 이 사람보다 내가 의료 지식적으로는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것. 또 간호사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누군가 아플 때의 의사결정은 나의 말이 더 힘을 갖게 되리라는 것. 그만큼의 책임을 느끼고 노력해야 할 우리 가족 안에서의 내 역할이 될 거라는 것을.



 덕분에 나는 신랑이 아프거나 병원에 갈 때면 늘 시험에 든다. 이것이 적절할까, 저것이 적절할까. 일반적으로는 이게 맞지만 어쩌면 신랑한테는 이게 맞는 것이 아닐까. 간호사를 그만둔지도 한참 되었건만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좋지 않은 기억으로 끝날 줄 알았던 간호사로서의 삶이 이제는 도움이 되는 걸 보면 기분이 묘할 때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내 과거의 배움과 경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기도 하달까.



나는 앞으로도 한 사람만을 위한, 우리 가족만을 위한 간호사로 살게 될 것 같다. 가끔은 두렵지만 또 꽤나 뿌듯하기도 한 나의 역할. 더 잘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야지 :)





신랑이 앓고 있는 희귀난치병인 크론병에 대한 이야기는 본 매거진에서 더 많이 보실 수 있습니다. 규칙적이지는 않아도 꾸준히 연재할 예정입니다.




신랑과 함께 다녀온 치앙마이 장기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브런치북에 담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