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코 Jul 08. 2024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법


5월에 친 DELF는 리스닝에서 망하면서 장렬하게 탈락했다. 불어 선생님이 혹시 모르니까 구유형(주관식, 객관식 혼합) 준비도 하라고 하셨는데 설마 유형 바뀐다고 한 지가 언젠데 설마.. 하는 생각에 신유형(객관식)만 준비하다가 망했다. 8주 동안 매주 모의고사만 쳤을 때는 넉넉하게 합격선이었는데 결과는 100점 만점에 42점 (50 이상 합격이다) 이라니.. 시험지를 펼치자마자 듣기 주관식 보고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진짜 망했다. 아까운 내 140유로. 가족 단톡방에 내 불합격 소식을 전하자 아빠는 '요령 알았으니까 또 쳐야지. 한국오기 전에 시험 붙어서 오너라'고 격려인지 잔소리인지를 해주셨다. 알았어 좀.. 


시험 당연히 붙을 줄 알고 회사에도 불어 시험 친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다 냈더니 시험 치고 난 뒤로는 결과 언제 나오냐고 매주 물어보던 동료들. 결과가 나오고 나서도 내 입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거의 한 달째하고 다녔다. 입이 원수지. 난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했는데 항상 이 '나름대로'가 문제다. 애초에 리스닝할 때도 듣기 한 걸 불어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했어야 하는데 결국은 내가 붙을 만큼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다. 다 내 탓이오.  


그래도 시험 준비하는 동안 불어가 늘긴 늘었다. 업무 메일도 불어로 쓰고, 소규모로 하는 회의는 불어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프랑스인들이 싹퉁바가지 없는 걸로 악명 높은데 우리 회사 직원들은 정말 sympa (상냥한) 해서 내가 실수하면 고쳐주고, 실수하는 거 겁내지 말고 프랑스어로 계속 말해보라고 용기를 준다. 그리고 조그만 발표라도 불어로 해내면 Bravo!!라고 엄청 칭찬해 줘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낼모레 40인데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다니. 회의시간에 어버버 하고 있으면 답답하고 시간 아까워서 영어로 하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실제로 남편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할 때 어리숙한 한국어로 발표했더니 답답하다고 동료들이 그냥 영어로 하라고 했다며.. 남편은 그때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있다.)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동료들, 특히 불어를 공부했던 동료들이랑 만나면 불어의 어려움에 대해서 한참 떠드는 편인데 하나같이 하는 말이, 다른 나라에서 그 나라말로 한마디라도 하면 엄청 칭찬해 주고 좋아하는데 프랑스인들은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거나 고쳐준다고. 내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누가 무안을 준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회사 동료들이 다정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보라색 = 프랑스 "제발 하지마"


이 인간들이 다정하다 못해 한술 더 떠서 '네가 시험에 떨어진 이유는 우리가 더 몰아붙이지 않은 탓'이라며 회의 때마다, 커피마시면서 수다 떨 때마다 이제 불어로 하자고 하는 건 좀 피곤하지만.. (내 뇌도 좀 쉬자)


애초에 완벽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서른 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실패에 대한 관점도 많이 바뀐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통과해서 불어 공부 손 놓는 것보다 감질나게(?) 떨어져서 다시 공부할 계기가 되었으니 이것 또한 좋다. 시험 등록비 140유로도, 시험을 치려고 별도로 수강한 불어 수업도 싼 금액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험 준비를 하면서 불어가 많이 는 건 사실이고, 더 준비해서 다음 시험을 치기로 했다. 안되면 다시 하면 되지.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시골마을 고양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