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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얀 Nov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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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문학 키워드 [운]



 지온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승옥은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말했다. 왜냐고도 묻지 않고 그저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이유로 대꾸했다. 승옥은 지온의 말이 선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지금의 삶이 충만하다고 느끼는 철 덜든 치기라고 생각했다. 승옥은 지온이 어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가 점점 퇴행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얼마 전에 TV에서 경제적 여건이 충분히 갖춰졌어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젊은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지온도 뉴스에 나온 저 중 한 사람이었으리라. 아이를 낳으면 인생이 충만해진다는 사실을 경험해보지도 않고 폄훼하는 짓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 난 다른 사람한테 내가 어릴 적 했던 고민들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나 같은 애 낳으면 걔는 그렇게 되겠지.


 승옥의 마음이 갑자기 서늘해졌다. 지온의 수험생 시절, 자신이 조금 밀어붙여 공부를 시킨 적은 있으나 큰 일탈 없이 내신과 수능 모두를 잘 챙겼다. 지온 자신도 원해서 했던 공부였다. 지온은 성적이 부진하면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일종의 승부욕이었고, 그럴 때마다 승옥은 지온이 좋아하는 닭죽을 끓여주며 열심히 서포트했다. 지온은 공부 잘하는 애들이 으레 진학하는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고, 학점도 잘 받고, 장성해서 취업을 하고, 지금은 대리가 되어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한 기업의 필수인력이 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고민이 있었을지언정 지온도 결과에 항상 만족해하는 티를 냈다. 지온은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 항상 앞섰다.

 지온이 친구들보다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한 덕에 엄마들 모임에 나가서 가장 먼저 한 턱을 쏜 것도 승옥이었다. 자랑할 곳이 있어 너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잘난 딸을 둔 승옥은 그 이후에도 모임에서도 지온의 근황을 늘어놓을 기회가 많았고, 그 때마다 엄마들은 ‘딸을 잘 두었다’는 소리를 했다.


- 너 같은 딸 낳으라는 말은 덕담이야. 널 낳을 수 있어서 참 행운이지.

- 내가 대체 어떤 딸이길래…  그거 너무 영화 마지막에 하는 말 같잖아.


 하긴 내가 너무 금방 컸지, 하면서 지온은 약간의 코웃음을 쳤다. 손에 쥔 스마트폰 액정을 자꾸만 껐다 켰다 했다. 쏜살같이 달려온 시간 덕에 지온도 슬슬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다. 남자도 몇 번 사귀었던 것 같다. 승옥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꼭 예쁘게 꾸미고 어디론가 가는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날에는 이따금 작은 꽃다발을 들고 집에 돌아왔는데,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면 오다가 예뻐서 샀다고 얼버무리곤 했다. 때가 되면 말하겠지, 우리 똑똑한 딸내미니까. 남자 보는 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결심한다면 말해주겠지, 이유가 있겠지, 남자를 사귀었겠지.

 

- 내가 앞으로 아이 낳는 데에 운을 쓰지 않는다면, 또 다른 곳에서 운을 쓸 수 있겠지? 내가 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고, 이미 썼을 수도 있고.


 스마트폰 액정을 만지는 손이 불안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는 있지만, 하고 싶었던 말을  참을 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도는 나도 안다. 네가 누구 딸인데. 지온은 한참의 침묵 끝에 승옥과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 엄마, 날 사랑한다면 그냥 행운을 빌어줘.








*<복면문학>이란 매주 하나의 주제를 정하여 익명으로 짧은 소설을 쓰고, 투표를 통해 한 작품에게 문학상을 수여하던 문학동인 무소속의 창작 독려 프로젝트입니다. 2015~2018년 사이에 썼던 작품을 퇴고해서 올리거나, 새로 집필해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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