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문학 키워드 [흙]
오늘은 어제처럼 창문을 열어놓고 잤어요. 이곳은 바람이 참 많이 부는 곳이에요. 밤이면 블라인드가 요란하게 흔들렸을 만도 한데, 나는 얼마나 깊게 잠들었으면 듣지도 못했을까요. 이불 밑에는 나 대신 잠옷만 있고 베개 위에는 한 줌의 연초가 쏟아져 있어요. 담배를 말다가 잠든 모양이에요. 나는 청바지도 겉옷도 그대로 걸친 채 눈을 떴어요. 두꺼운 옷은 침대 위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당신이 나에게 말한 적 있어요. 당신은 그 대사가 나름대로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면서 입술을 실룩였겠죠. 당신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흐르든 나를 향한 말이라면 난 기쁨에 떨면서 모든 음절을 기억했어요. 괜히 멋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까 싶었지만, 당신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리고 내 마음이 부끄러워서 말은 하지 않았지요.
짓눌린 풀냄새가 나요. 건조한 미풍이 풀을 비비며 풍기는 향이 아니라 잔뜩 이겨진 단면이 내는 진물 냄새예요. 관리인이 아침 일찍 잔디를 밀었나봐요. 나는 그 사이에서 흙냄새를 찾아 눈을 감고 집중을 해요. 내가 아직은 예민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예요. 가끔가다 잔디깎이가 땅에 큰 흠집을 낼 때가 있거든요. 분쇄된 나뭇가지, 잎, 담배 필터, 새의 배설물, 파리의 날개, 꽃가루, 지렁이 토막, 지난겨울의 눈송이, 침, 석회, 꽃잎과 버섯. 무엇 할 것 없이 하나의 흙이 되어요.
아아, '하나'의 흙이라니. 나는 '하나'의 흙냄새를 찾아 눈을 감고 콧구멍을 놀리니, 생生이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존중을 뭉개 놓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망나니에 지나지 않죠! 생들은 최후에 가장 낮은 곳에서 모여요. 내가 진정으로 그들의 냄새를 맡고 싶다면 그곳으로 가야 해요. 그렇지만 나는 창문을 열어놓고 스스로의 후각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죠. 처량하게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어요.
비가 그치면 처마 밑에 숨어있던 비둘기들이 잔디로 날아와요. 젖은 흙 밑에서는 숨을 쉴 수 없는 지렁이가 지상으로 올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부리로 찍고 열심히 도리질하면서 이제 막 질식에서 벗어난 지렁이를 먹어요. 그리고 멍청하게도 인기척에는 꽁무니 빠지게 도망을 가요. 너무나 당연하게도, 날 수 있기 때문에 지붕 위에 올라갈 수 있어요. 비 온 뒤의 비둘기들은, 먹는 것이 살기 위한 즐거움이고 도망가는 것이 살기 위한 공포임을 증명해요.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에요. 어느 순간만큼은 시간이 더디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있거든요. 나는 베개에 흘린 연초를 손금 사이에 받아 모아요. 한 개비 말기에는 조금 모자라네요. 연초 봉지를 찾아서 종이 위에서 살살 흔들어요. 흘리면 청소기를 돌려야 하니까 힘을 잘 조절해요. 흰 필터를 놓고 흰 종이를 말아요. 가볍게 혀로 훑어요. 빈 틴 케이스에 넣어요.
이것 봐요. 나는 부끄럽게도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해요. 집착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집중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되어요. 적어도 열등한 이 집착이 수치스러운 것임을 알고 있으니, 나 조금 더 신선한 공기를 들이쉬어도 될까요? 일제히 씨방을 터뜨리는 꽃나무, 꽃이 없는 나무, 꽃만 있는 민들레, 그들의 솜털이 바람결에 흐노는 생명의 5월에 보속補贖 없이 숨을 쉬어도 괜찮을까요? 나 덜 고백한 것이 있어요. 옆집 창문에 반사되는 햇빛도, 금요일에 막 날아온 고지서도, 어차피 흙 되면 사라질, 삶의 저열한 파편들이 당신을 조금씩 낯설게 해요. 이것이 가장 무서워요. 시간이 더디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되거든요. 시간이 빠른 것과 느린 것, 어느 쪽이 괴로운지 더는 가늠하지 못해요.
그러나, 사랑하는, 당신, 무엇이 되었든 나를 믿어주세요.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쓰고 있어요. 당신이 잠든 흙 위에 이렇게 내 더러운 날숨을 뉘여요. 나는 오늘도 약속해요. 삶의 파편들이 하루살이 유충처럼 연못의 물을 흐릴지라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당신의 말들을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신께 영원을 빌게요. 당신을 기억하던 나의 생을 무한히 지연하도록.
*<복면문학>이란 매주 하나의 주제를 정하여 익명으로 짧은 소설을 쓰고, 투표를 통해 한 작품에게 문학상을 수여하던 문학동인 무소속의 창작 독려 프로젝트입니다. 2015~2018년 사이에 썼던 작품을 퇴고해서 올리거나, 새로 집필해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