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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Dec 06. 2021

주전자 하나에 기억과, 드립 커피 한 잔에 온기와,

드립 커피 입문기

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 인턴으로 일하던 곳에 빵이나 뜯어 먹을 겸 놀러 갔다가 산휴대체직 권유를 받고 입사 지원을 해 덜컥 회사원이 되었다. 일 년쯤 일하고 있었을까. 어느 날은 새로 입사하신 분이 첫 출근을 하셨다. 인사를 하는데, 인상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자기소개를 듣고 있는데 어라, 아는 이름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같은 반은 한 적 없지만, 얼굴과 이름은 알았던 친구. 


“안녕하세요. 저 그런데, 혹시 88년생이세요? 얼굴이랑 이름이, 제가 아는 분 같아서…”

“저도 알 것 같은데…”


내가 생각했던 그 친구가 맞았다. 가영이. 세상은 넓기도 하지만 이렇게 좁기도 하구나. 이 작은 회사에서 만난 게 아는 사람이라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영이는 심지어 우리 집 바로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중, 고등학교 때 학원에 다니면서 동네에서 몇 번 스치듯 본 것도 같다. 넓은 흰색 카라가 예쁜 옛날식 여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이었는데.


당시 회사는 오픈, 일반, 마감 조가 나뉘어 있었는데, 출퇴근 시간이 맞는 날이면 가영이와 항상 함께 다녔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지하철만 40분 정도 타는 긴 여정이라 같이 다닐 친구가 있으면 열차에서 보내는 무료한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환승역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은 덤이었지.


어느 날부터는 가영이에게 드립 커피 내리는 법을 배웠다. 가영이는 출퇴근이 편하도록 서울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댁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커피를 좋아하셔서 커피를 내리시는 것은 물론 원두 로스팅까지 직접 하신다고 했다. 가영이도 자연스럽게 할아버지께 커피를 배워 드립 커피를 뚝딱 잘 내렸다. 회사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애매하게 남는 시간을 틈타 가영이에게 드립 커피 내리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가영아, 그런데 드리퍼는 어느 브랜드 제품이 좋아?”

“할아버지 댁엔 고노 드리퍼가 있어.”


그 말을 듣고 고노 드리퍼와 드리퍼에서 떨어지는 커피를 받을 고노 서버 주전자를 샀다. 더 조사해 보았자 나는 드립 커피 장비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어떤 제품이 좋은지 분별할 눈이 없을 테니까. 


원두를 갈고 종이 필터를 깐 드리퍼에 원두를 붓고서는 주둥이가 가늘고 긴 주전자로 살살살 물을 부어가며 커피를 내렸다. 방금 간 원두는 로스팅한 지 시일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꽤 잘 부풀어 올랐다. 커피 뽕을 띄우는 재미에 푹 빠져 점심시간에는 늘 커피를 갈아 드립 커피를 내려 마셨다. 재미도 있었지만, 조심조심 물을 붓는 데 집중하다 보면 쌓여있던 골칫거리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가영이는 가끔 할아버지께서 직접 볶으신 원두를 주기도 했는데, 볶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원두를 바로 갈아 내려 마시면 맛이 일품이었다. 가영이에게 직접 로스팅한 커피가 너무 맛있다고 하자, 가영이는 할아버지께서 커피 로스팅하시는 날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드디어 가영이네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가게 되었다. 할아버지 댁에 사이폰이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직접 사이폰으로 커피를 추출해주신다고 하셨단다. 자고로 신문물을 접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말고 얼른 가서 봐야 한다. 주말이었지만 단정한 옷을 골라 입고 길 건너 가영이네 집으로 향했다.


가영이네 집에 도착해 과한 90도와 정중한 120도 그 사이 어딘가의 각도에 맞춰 과한 정중함을 표방하며 깍듯이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손녀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할아버지께서 사이폰 기계를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시는데 말씀 하나하나에 따스함이 스며 나오는 듯했다.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갓 내린 커피를 마실 때처럼 마음에 온기가 퍼져나갔다.


이후에도 열심히 커피를 내려 마시다 퇴사를 했다. 회사에서 사용하던 드리퍼와 서버 주전자를 집에 가져다 놓고는 종종 그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여 마시곤 했다. 하루는 보리차를 하이라이트에 올려놓고 깜빡 잠이 들어 주전자를 다 태워 먹었는데, 박박 문질러 씻다 기어이 주전자를 깨고야 말았다. 


급한 대로 새 주전자를 샀다. 고노 제품은 아니었는데, 아. 그립감이 달랐다. 손잡이를 잡고 물이 가득 담긴 주전자를 들어 올릴 때의 느낌이 사뭇 달랐다. 고노 주전자는 쥐었을 때 안정감이 있었는데 이 주전자는 손잡이가 손 아래로 빠져나가 떨어질 듯 불안했다. 할아버지께서 고노 제품을 사용하시는 이유가 있었구나.


서버 주전자는 깨졌지만, 집에는 아직 고노 드리퍼가 있다. 지금도 배송받은 원두 봉투를 처음 열어보는 날엔 항상 고노 드리퍼를 꺼내 드립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내릴 때마다 가영이 할아버지의 상냥하고 따뜻하신 목소리가 떠올라 서버 주전자에서 올라오는 커피 향이 더욱더 향긋하다. 커피를 담은 컵을 손으로 감싸면 느껴지는 온기도 더욱더 따스하게 느껴져서 괜스레 마음도 포근해진다.


문득 '물건 하나하나에 기억이 남고, 의미도 새기는 게 사는 과정일 것일까' 생각해본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을 담듯이. 그렇다면 나도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내게 의미가 담긴 물건들을 옆에 두고 기억을 하나하나 되살려보다 잠들듯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 <타이타닉>의 로즈 할머니가 배 위에서 지난날의 사진들을 옆에 두고 잠이 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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