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위기의 순간에도 기지를 발휘하다
선글라스를 끼고 화려한 귀걸이와 목걸이를 걸친 오드리 헵번이 택시에서 내린다. 그녀는 몇 걸음 걸어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전시된 보석상의 유리창 앞에 서더니 손에 든 봉투에서 크루아상 빵을 꺼내 한 입 베어 먹고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면 보석상 내부의 보석들을 바라본다.
제3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받았으며 로마의 휴일과 함께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명장면으로 꼽히는 오프닝의 한 장면이다. 이때 영화에서 나았던 보석상이 바로 뉴욕 5번가에 있는 티파니 보석상이다.
나는 1990년 미국보석학회에서 보석 감정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돌아온 직후 티파니 보석을 구매하기 위해 미국 출장을 떠났다. 그때 당시 나는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학생 신분 비자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나는 인사담당자에게 출장을 가게 되면 새로운 비자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문의를 했다. 담당자는 미국보석학회에서 연수를 마치고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보석 관련 업무로 가는 것이니 비자를 그대로 사용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나 또한 별다른 생각 없이 그대로 출국했다.
출장은 사장과 가장 그리고 내가 함께 떠났다. 뉴욕 JFK공항에 도착해 입국 허가신고를 하기 위해 입국심사대 직원에게 비자를 내밀었다. 그 직원은 내 비자를 살펴보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말에 순간 내가 비자를 더 정확히 체크를 하지 못했구나 하는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인가? 사장과 과장은 티파니 측에서 픽업을 나와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이미 입국심사대를 빠져나간 뒤였다. 내가 망연자실하여 어쩔 줄을 몰라고 하고 있으니 입국심사대 직원이 대한항공 직원을 불렀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기업에서 출장을 온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출장요 비자를 소지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보석 오더 관련 서류를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돌아가게 되면 출장은 나로 인해 완전히 망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 위기를 빠져나갈 방법이 무엇일까 절박하게 생각하고 생각했다. 아!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갑자기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입국심사대 직원에게 “나는 미국의 보석상에 많은 보석을 구매하러 온 사람이다. 미국 달러 현금으로 큰 금액을 지불하러 왔다.”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러자 그가 눈이 위 둥그레지며 말했다.
나는 즉시 가방에서 티파니 보석 오더 관련 서류를 그에게 전네며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는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전화를 걸었다. 티파니 본사네 직접 확인 전화를 한 것이다. 전화 통화를 하는 그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통화를 마친 그가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행운을 빈다.”라고 하며 입국을 허가해 주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사장과 관계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밖으로 나오니 사장과 과장 그리고 티파니 일행들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입국심사대에서 있었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들 모두 환하게 웃으며 지혜롭게 잘 대처했다고 박수해 주었다.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티파니 본사에 방문했다. 건물 외벽이 회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웅장함을 뿜어내는 느낌이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눈을 잡아끈 것은 정문 진열장에 전시된 눈부신 보석들이었다. 미국보석학회에서 보석 공부를 하면서 책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보석들이었다. 전통적인 티파니를 상징하는 민트 블루 색상 박스가 그곳에 놓여 있었다. 하얀 리본으로 장식된 다양한 보석들이었다. 마치 보석 분야에서 티파니의 권위를 상징하듯 모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도록 화려하게 진열이 되어 있었다.
보석 상품 오더가 끝나자 그들은 저녁 식사에 우리를 초대해 주었다. 그리고 식사 후에 세계 최고의 뮤지컬로 꼽히는 ‘캣츠’를 관람시켜 주었다. 브로드웨이 현장에서 보는 뮤지컬 캣츠는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였다.
내가 만일 공항 입국대에서 비자 문제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면 그런 감동은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생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의 순간이 갑자기 들이닥칠 때가 있다. 바로 그때 그 상황에 그대로 굴복해 버리면 안 된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 위기와 관련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일반적인 절차를 떠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