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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웨지감자 Feb 27. 2024

박사 과정 시뮬레이터로부터 배운 것

연구에 전념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

뉴스레터 헤비 구독자인 내가 여러 차례 소개받은 외국 게임이 하나 있다. <박사 과정 시뮬레이터>가 그것이다. (https://research.wmz.ninja/projects/phd/index.html)


이 게임은 박사과정에 합격하였으니 오퍼를 수락하겠냐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Accept/Decline 중 수락하면 게임에서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졸업을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는 것이다. 게임을 시작할 때 Hope를 100점으로 풀충전 한 뒤 시작되는데, 이는 오퍼레터를 받을 때만 비칠 뿐, Accept 버튼을 누르는 순간 바로 희망이 50점으로 내려간다.


아무튼 Qualification test라고 불리는 퀄 시험부터 시작해서 졸업요건으로 설정된 논문과 학회 발표를 일정 수 이상 (보통 논문 3개, 또는 논문 2개 + 학회 참석 2회) 성공하면 해피엔딩으로 졸업하게 된다. 그러나 졸업요건을 다 채우기도 전에 희망이 바닥나버리면 박사과정을 그만둬버리는... 무시무시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게임을 3회 진행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시켜본 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고 글로 적어두고 싶었다.






첫 번째 시도. 처참하게 실패한 모습이다.


4년 10개월 만에 게임 속 나는 모든 희망을 잃고 박사과정을 그만두는 것을 선택한다. 논문 코앞까지 가서 성과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내면의 불안과 교수님의 불만을 마주하여 최악의 상황을 마주한 것이다. 무엇이 나에게서 모든 희망을 앗아가고 4년이나 투자한 학위과정을 그만두게 만들었을까?


나는 굉장히 성실하게 연구에 임했다. 자주 논문을 읽었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이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모든 아이디어가 유효한 것은 아니었다. 기껏 떠오른 아이디어를 접게 만드는 것은 때로는 교수님의 반대이기도 했고, 때로는 선행연구에서 이미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컴퓨터가 망가지기도 했고 실험기기가 고장 나기도 했다. 심지어 고장 난 실험기기를 테크니션이 제대로 고치지도 못해서 연구가 더욱 지연되었다. 겨우겨우 얻은 아이디어는 그렇게 자주 폐기 처분되었고, 살아남은 것은 학회에서 거절당했다.

점차 절망한 나는 점점 더 일에 매달렸다. 학회에라도 억셉되면 희망은 회복될 것이라 믿었으나 쉽사리 되지 않았다. 희망이 간당간당할 때 일에만 매달려서 결국 모든 것을 소진하고 학교 밖으로 나간 것이다.






아 망한 게임이네. 이거 못 깨네.라고 생각했을 때 연구실 선배가 6년 만에 졸업했다며 화면을 보여주셨다. 비결은 잦은 휴식이라고 했다.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게임 속 나는 현실 속 나와 많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불안할 나는 주로 일에 매달리곤 했다. 다음 성과에 모든 희망을 건 채로.


나는 바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쉬는 일을 죄악시했다. 시뮬레이터 속의 학생도 쉬다가 지도교수에게 자주 걸리곤 했다. 나는 그게 너무 끔찍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쩐지 내 주변 친구들이 시뮬레이터 속의 학생을 졸업시키는 걸 보니까 그걸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이번에야말로 팍팍 쉬어가면서 하겠다 생각하고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한번 더 졸업하지 못했다. 세 번째 시도 끝에 드디어 나는 박사가 될 수 있었다.




세 번째 시도 끝에 졸업하면서 느낀 점.

시간이 정말 빠르게 가는구나. 시간에 집착해 봐야 크게 소용없구나 (연구 결과가 언제 논문에 낼만큼 만족스러워질지 알 수 없구나). 휴식으로 희망을 재충전하지 않으면 필패하는구나. 누구나 Late year anxiety를 겪는구나. 한번 페이퍼로 결과를 내면 내 논문을 누가 인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구나.


심지어 내 눈앞에서 플레이한 친구의 경우에는 3년 차까지 아무것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가 마지막에 모든 성과를 몰아서 달성한 후 7년 차에 유유히 졸업하였다. 그때 깨달은 것은 어쨌거나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졸업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구나...


석사 학위를 너무너무 힘들게 따고 지친 와중에도 박사를 생각하는 나에게는 정말 필요한 게임이었다.

내게 불필요한 마음가짐이 무엇이었는지 점검해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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