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서울 JTBC 마라톤 풀코스 후기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유익한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이기도 하다.(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다섯 해째 달리고 있는 러너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건 2020년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길 위에 발을 디딘 건 22년부터였다. 그해 10월, 경포마라톤에서 10km를 처음 완주했고, 이어 하프코스 완주, 그리고 올해 풀코스 마라톤을 목표로 삼아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어 24년 3월, 두 번째 육아휴직을 결심했다.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더 많은 것을 해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육체가 시들면 정신도 갈 곳을 잃고 만다는 하루키의 말처럼 마음과 몸은 따로 놀기 시작했고 다시 제대로 뛰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달리기가 내 일상에 깊숙이 들어왔다. 한 달 100km씩, 그 이상을 채우기 위해 달렸다.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내 마음 한구석엔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집에서 육아와 가사, 그리고 일로 지친 아내를 남겨두고 홀로 목표를 향해 달리는 내 모습이 점점 더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잘 살아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그 사실이 고통이었다. 내가 나름 육아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그 ‘나름’은 결국 내 기준에서의 나름일 뿐이었다. 아이는 그 사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고 긴 적응기간이었지만 무사히 적응하자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되었다.
달리기와 육아, 그리고 일. 그 세 가지의 사이 어디쯤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틈나는 대로 뛰었고, 여름의 푹푹 찌는 더위조차도 나를 멈추게 하진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뛰는 고통보다 뛰지 못하는 고통이 나를 더 괴롭혔던 것 같다.
그렇게 쌓은 거리와 시간들 속에서 한 번은 30km를 넘게 달려보기도 했다. 부족한 훈련이었지만, 그래도 5개월 동안 월 120~150km 정도를 꾸준히 채웠으니 풀코스 완주는 할 수 있겠지. 그런 어설픈 자신감을 품은 채, 나는 어느새 11월을 맞이했다.
11월 2일 대회 전날, 아내와 아이의 응원을 받고 KTX를 타고 강릉에서 서울로 향했다. 전날 형과 만나 테이핑을 준비하고 일찌감치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상암월드컵 경기장으로 향했다. 엄청난 인파는 예상했지만 예상보다 더 엄청난 인파가 있었다. 아마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엄청난 인파가 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이다. 소변을 보기 위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엄청난 줄. 거기서 나는 화장실을 택하지 않고 그냥 달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 왜 그랬을까..) 그래도 풀코스 완주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출발했다.
편안하게 630 페이스로 형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10K까지는 무리 없이 잘 뛰고 있었고 슬슬 550~600으로 페이스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소변이 마렵기 시작했다. 참고 뛰면 뛸수록 아랫배의 불편감을 더해 갔고 어쩔 수 없이 근처 주유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설상가상으로 화장실 앞엔 다른 러너들이 줄을 서있었고 10분가량 화장실 줄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생각. 내가 화장실 가느라 허비한 10분을 어떻게든 만회해야겠다는 생각. 달리기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지만 내 온몸은 이미 경쟁이라는 물에 빠진 솜뭉치이었다. 그렇게 오버페이스를 하게 되었고 하프를 넘긴 지점에서 다리가 잠기기 시작했다.
그때 생각했다. 완주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
온몸을 질질 끌고 가다시피 하면서 잠실대교를 건넜다. 이때부터 폭염에 버금가는 땡볕의 더위에 몸도 마음도 더 많이 지쳐갔고, 30km 지점에서 결국 DNF를 결심했다.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달리기가 즐겁지 않았다. 고통 그 자체였다. 그렇게 나의 첫 마라톤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가장 큰 이유를 정리해 보자면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러닝 마일리지의 부족이다. 풀코스를 뛰기 위해서는 적어도 3~4개월 전부터 월 200km 이상은 달려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턱 없이 부족한 훈련량이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
두 번째는 컨디션(생리현상) 관리의 부족함이다. 오래 기다리는 한이 있어도 달리기를 하기 전에는 최상의 몸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세 번째는 오버페이스였다. 교사로서 항상 아이들에게 남과 비교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내가 경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자 남들과 비교하고 흔들리고 말았다. 나는 뒤쳐졌다는 생각에 휘둘린 나머지 무리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번 경험으로 뼈아프게 배운 것이 바로 오버페이스의 위험성이었다. 그것이 달리기이든 혹은 삶의 여정이든 다르지 않다. 어떤 목표에 눈이 멀어 현재의 나를 돌아보지 못할 때, 나의 페이스를 조율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나의 삶이 하나의 긴 달리기라고 한다면 아내는 그 여정 속에서 나의 페이스메이커이다. 내가 과속으로 달릴 때는 속도를 줄여주고, 느려질 때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흔들리는 길에서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인연임을 느꼈다.
비록 주로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지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실패는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그리고 우리를 더 단단히 만들어준 또 하나의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