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준비하자
이맘때면 남몰래 준비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건. 배. 사.
10년 전, 머릿속이 새하얘지도록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
"자, 우리 과에 여러 새 얼굴들이 왔는데요, 방송작가였다니까 짱니 씨부터 건배사 들어 볼까요?"
'뭐? 건배사? 난 준비도 안 됐는데, 건배사를 지금?'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없다. 그저 '이 순간만 지나면 돼'라고 마음을 다독이며 의미 없는 말들만 나열했던 것 밖에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고,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뭐 이런 초등학생 수준의 말들을 내뱉으며 시간을 때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빨개진다.
그런데 '이 순간만'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의 건배사 역사는 '그날부터' 시작이었으니까.
'어공'이 되기 전에는 건배사를 할 일이 전혀 없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였으니 회식 분위기도 그야말로 '프리'했다. 회식은 정말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고, 다음 방송을 잘 준비하자는 각오로 술잔에 기대어 솔직한 생각을 나누는 편안한 자리였다.
반면 공무원 조직의 회식은, 정말로 업무의 연장이다. 그래서 형식이 존재한다.
누군가 사회를 보고, 차례로 '건배사'를 한 후 그만큼의 술잔을 비워낸다. 물론, 최근 3~4년 사이 공직 사회의 회식 문화도 많이 바뀌었지만, '건배사'만은 건재하다.
고로, 상하반기 인사이동이 마무리된 이즈음부터 슬슬 건배사를 준비해야 한다. 새로 들어온 직원은 물론이고 기존에 있던 직원들까지 빠짐없이 마이크가 돌아가는 경우가 흔하다.
'건배사, 피할 수 없으니 준비하라!' 10년 공직 세월이 알려준 가르침이다.
단, 스스로 다짐한 것이 하나 있다. 건배사에 나를 담아 보겠다는 것. '진달래', '청바지', '이멤버리멤버'이런 뻔한 건배사는 내가 아니어도 반드시 누군가 한다.
실제로 한 자리에서 건배사가 겹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앗, 저거 내가 준비했는데..' 하면서 급하게 뒤돌아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본다. 나 역시 그랬다. 그만한 낭패가 없다.
사실, 건배사는 아무 죄가 없다. 그 건배사를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사람과 문화가 잘못이지. 그러니 나부터라도 바뀌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공무원의 회식에서도 건배사가 제 빛을 발할지 모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한 7년 전쯤, 그 빛을 본 적이 있다. 지방도시 시청에서 근무할 때 '멋진 건배사는 저런 거구나'라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해외 도시 단체장과 기업 바이어들을 초청한 국제 행사였다. 주빈 중 한 명이 청중을 향해 술잔을 높이 들고, 좌중을 바라보며 30~40초 정도의 짧은 연설을 건배사로 대신하였다.
'한국의 작지만 강한 도시 00 도시와 우리 00시와 인연이 시작되는 뜻깊은 자리에 함께 해 영광'이라는 명확한 메시지가 담긴 말이었다.
건배사를 대하는 그의 진중한 태도와 행사의 의미를 더하는 메시지가 만나 자리의 격을 한층 높였다. 건배사만으로 품격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때가 유일하다. 그 이후로 내가 들어온 건배사들은 유쾌하고, 재미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들이었다. 때로는 너무 성적인 농담이 섞여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준비한다. 어쩔 수 없이 건배사를 해야 한다면 내가 있는 그 자리만큼은, 내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는 그 순간만큼은, 작은 가치라도 만들고 싶었다.
나는 건배사에 '나'를 담는다. '나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뽑아낸 짧은 구절을 선후창 문구로 제안한다.
다음 주면 우리 과도 회식을 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건배사를 준비했다. 내 옆에 새로 온 짝꿍을 환영하는 마음을 담아...
보통 '첫인상은 잘 안 바뀐다'라고 하는데요,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제가 초등학교 때 기억에 남는 짝꿍이 있었어요, 저랑 짝꿍 된 걸 정말 싫어했던 친구인데,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제 쌍둥이 언니를 좋아했던 거예요. 얼굴만 똑같고 성격은 정반대인 제가 짝꿍이 되니까 싫어했던 거더라고요. 그런데 며칠 지나서는 제 괜찮은 구석을 봤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 잘 지냈어요.
새로 짝꿍이 되신 00님, 저를 좀 어려워하시던데, 제 겉모습만 보지 마시고 제 좋은 구석을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사로 '첫인상도, 바뀐다' 하겠습니다! '첫인상도', '바뀐다!'
건배사에 나의 이야기를 담아보세요.
나의 가치, 그 자리의 가치가 높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