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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샌프란 곽여사 Apr 30. 2024

어제의 그 남자를 만나러 달려갑니다

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사실은 사소한 즐거움의 연속!

금문교 바로 앞 전망대 스팟

간밤에 미리 준비해 둔 운동복을 재빨리 입고 내가 가진 운동화 중에 제일 비싼 것을 신고 나섰다. 오늘은 아주 온화한 온도라 바닷바람이 제법 분다고 하더라도 달리기엔 아주 좋은 날씨다. 게다가 어제의 그 남자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약간 설레기까지 한다. 하룻밤의 일탈을 꿈꾸던 그 남자는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을까? 그를 생각할수록 웃음이 났다.


그는 어제 바에 손님으로 들어왔다. 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선 모습을 봤을 때 사실은 화장실이 급했는데 남의 영업장에 들어와서 화장실만 쓰고 그냥 나가기 미안하니 눌러앉은 듯했다.  화장실을 쓴 값은 하자, 그런 심정으로 적당히 술을 시켰으리라. 그렇게 앉아서는 곧 휴대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뉴욕에서 열린 미팅에 참석했다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중간지점인 샌프란에서 휴식차 이틀을 쉰다고 했다. 남자는 중국 베이징 출신인데 중국인 특유의 엑센트가 없는 훌륭한 영어를 했다. 미국에 오기 바로 전에 이혼을 해서 기분이 우울하다며 혼자 스트립 클럽을 갈 생각인데 혼자 가기 무서워서 바에서 알코올의 기운을 빌린다고 했다. 동료가 있는데 왜 같이 안 가냐고 했더니 직업상 (변호사)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 그런 일탈을 하는 모습은 보일 수 없다며 웃는다. 내일은 뭐 하냐고 물으니 금문교를 갈 생각이라고 했다. 지난밤 스트립 클럽에서 지나치게 흥이 나서 온 밤을 불살랐다면 금문교는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름을 물으니 로렌스라고 했는데 오늘 금문교에서 혹시 그를 만난다면 맛있는 커피를 사겠다고 결심을 하며 집을 나섰다. 스트립 클럽에서 헐벗은 젊은 여성들을 보며 가진 돈을 탕진했다면 속이 쓰릴지도 모르니 쓴 커피 말고 달달한 커피를 사줘야 할지도 모른다.

유쾌한 로렌스를 생각하며 달려서 그런지 발이 너무 가볍다. 최근 무릎이 안 좋아서 달리는데 애를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쉽게 지치고 달리는 게 즐겁다는 생각보다는  무릎 주행테스트(?)를 한다는 기분이었는데 오랜만에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달리게 되었다. 같은 장소를 매일 달리는데도 매일 느껴지는 것이 참 다른 게 너무 신기하다. 어느 날은 더 이상 달리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발목이 흔들리고, 어느 날은 내일이라도 하프마라톤을 달릴 것처럼 힘이 넘치기도 한다. 오늘은 금문교까지 단숨에 달려갈 수 있을 것처럼 힘이 넘친다. 모두 로렌스 덕분이다. 유쾌한 사람과 잠시 나눈 대화에 나도 그 기운을 받았고 사소한 그 즐거움이 다음을 살아갈 큰 힘이 된다

금문교에서 바라본 Crissy field

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만한 여행이나 큰 이벤트가 아니라 사실은 아주 사소한 즐거움들의 연속이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는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한 적도 분명 있었지만 굵직한 한 방은 그저 한 방으로 잊히고 만다. 백세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굵은 한 방보다는 가늘더라도 온화하고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의 연속이 더 절실하다.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코미디언이 아니라 직장동료의 허무개그 한 방이며, 나이 드신 아버지의 짧은 카톡 하나이고,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짤 한 컷들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삶에서 작고 귀여운 것들과 짧은 인연의 스침에서도 행복을 보는 태도이다.

기분이 너무 좋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렌스를 마주치지는 못했다. 금문교를 달려갔다 돌아와서 일부러 전망대 커피숖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그를 보지는 못했다. 커피와 간단한 점심을 먹으며 속으로 아, 멋진 밤을 보냈구나!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를 만나지는 못했어도 그를 생각하는 내내 웃음이 나 무척 즐겁게 달리기를 마쳤다. 아마 나는 그를 곧 잊을 테지만 그를 생각하며 달린 유쾌한 기분은 오래 남을 것이다. 하루를 너무 상쾌하게 보내 기분이 너무 좋다.


로렌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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