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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Sep 04. 2024

완벽한 남편뿐인가

훌륭한 아들도 있는 나는야 행복한 사람

지난달 이야기다.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다녀가시고 며칠이 지나서까지도 풀리지 않는 마음이 답답하고 속상했다.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시누형님에 대해 언급하시고 먼저 연락하라고 상관하시는 것이 (어른에게 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약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남편이 있을 때와 없을 때 태도를 다르게 해야 한다는 언니들의 조언을 들었으나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을뿐더러, 시어머니를 보면 그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압도적이기에 당연히 잘 되지 않는다.


시어머니가 육지로 돌아가신 날, 그때의 일이 스트레스로 남아 설거지를 하며 혼자 푹팍거리고 있었다. 기분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감이 번지듯 빠르게 뻗쳐 나갔다. 결국 생각의 종착역은 자책감이었다. 시댁일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일인데 왜 나는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는지 스스로를 자책하는 걸로 매일 결론이 난다. 그러다 이번 일에서 좋은 면은 없을까 긍정적인 면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그날 어머니가 형님에게 연락하라고 종용하는 말씀을 하실 때 실시간으로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당신 출근하자마자 형님한테 왜 연락 안 하냐고. 그래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했어. 그런데도 네가 그때 그렇게 하고 갔는데 걔가 연락을 먼저 어떻게 하냐며 뭐라고 하셨어. 그리고 임신했대."


남편은 "그걸 왜 당신한테 말해? 누나랑 연락하는 거는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거참, 엄마가 실수했네. 이상해. 내가 말할게요."라고 답장이 왔다.


그 이후 누나에게 연락하는 건 내 할 일이지 아내가 할 일은 아니라고 똑 부러지게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시댁단톡방에서 빼내 준 것만이라도 큰 일 했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께 말을 했든 안 했든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하든 안 하든, 어쨌든 나에게 엄마를 나무라는 말을 해준 남편이 고맙고 든든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의 전환을 하고 나니 마음은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설거지를 하며


"에휴, 그래. 완벽한 남편이 있으면 됐지."라고 말을 내뱉었다.

2층에서 레고로 자기 작품을 만들고 있던 아이가 말했다.

"완벽한 남편뿐인가."

요즘 아이가 일본만화를 자주 본다. 우리나라 성우들이 더빙을 한 대사들을 억양까지 잘 살려 곧잘 외우고 따라 하는데, 딱 그 성우톤으로 짧지만 강한 대사를 남긴 아이 때문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해졌고 잠시 뒤 남편과 나는 빵 터져버렸다. 그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훌륭한 아들까지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그러고 며칠 뒤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내가 할머니한테 말씀드렸어요. '갑자기 고모이야기를 꺼내고 갑자기 전화하라고 하셨잖아요. 할머니가 그렇게 하시면 저희 엄마가 많이 불편해요. 갑지가 할머니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당황스럽고 불편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할머니가 알겠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엄마. "


"고마워. 엄마를 대신해서 말해줬구나. 공손하고 예쁘게도 말했네. 고마워."


언제 이렇게 컸지. 이런 점까지 신경 쓸 나이는 아닌데 말이다. 그저 장난감에 신나 하고 노는 것에 좋아하며 천진난만해도 될 나이인데 엄마를 대신해서 할머니에게 엄마의 불편함을 대변한 아들이라니. 기특하기도 했지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또한 아이가 나의 관계를 다 읽고 있구나, 느끼고 있구나를 알게 되었고 어른스럽지 못했던 지난 나의 행동들을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지금보다 관계에 더 성숙한 엄마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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