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_세무사까지 5,500시간
제트스트림 0.7mm 16개, 3색 볼펜 검정 3개, 3색 볼펜 빨강 1개, 모나미 0.7mm 121개.
5,500시간 동안 사용한 볼펜의 개수다. 언제부터 사용한 볼펜을 모았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스톱워치를 사용하던 시점과 볼펜을 모으던 시점이 비슷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볼펜을 모으기 시작한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형형색색 다양한 펜을 썼었다. 필기량이 많지 않고, 쓰면서 공부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볼펜을 끝까지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가서는 모나미 볼펜 하나를 들고 수업을 듣곤 했는데, 그조차도 필기량이 많지 않으니 모나미 하나로 2년은 사용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모나미 볼펜을 끝까지 사용한 건 수험생활을 시작한 해였던 것 같다. 문제 풀이가 많았고, 연습장을 쌓아가며 공부를 했었다. 그때도 여전히 사용하는 볼펜은 모나미였는데, 한 달쯤 지났을까? 볼펜에서 더 이상 잉크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처음으로 새 것부터 끝까지 사용한 첫 볼펜이었다. 그날은 참 신기한 경험이었는지 다 쓴 볼펜심을 버리지 않고 서랍에 넣어두었었다. 그러던 것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해서 저만큼 모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 달 단위로 사용하던 볼펜이 과목에 따라서 2~3일에 하나씩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러버렸다. 사용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모나미 특성상 볼펜 똥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그걸 감안하고도 이틀에 하나씩 볼펜심을 갈 때는 뿌듯하기도 하면서 무섭기까지 했다.
2차 과목 중 세법학은 논술 문제에 가까워서 2차 답안지 기준으로 10페이지는 기본으로 써 내려가야 한다. 그래서 볼펜을 잘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당시에는 펜은 기본이고, 2차 시험용 글자체가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시험용 글자체라는 건 알아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깔끔하게 보이되, 연속해서 쉬지 않고 흘려 내려가며 써 내려가는 글자체를 말한다. 글자체 연습까지 할 여력은 없는지라 펜에 신경을 많이 쓰려고 노력해봤는데, 손에 익을 대로 익어버린 모나미를 대체하는 건 꽤나 어려웠다. 물론 그 외 고급 볼펜의 가격이 비싼 것도 한몫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의고사 때나 실전용으로 제트스트림을 사용하였고, 그 외 혼자서 공부할 때는 모나미로 사용했다.
사용한 볼펜 개수가 훈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험생활이 길어질 대로 길어진 못난 자화상이기도 했다. 똑똑하고 더 열심히 노력하는 친구들은 볼펜을 훨씬 더 적게 사용하지 않았겠는가.
합격하고 나서 지금은 모아둔 볼펜심이 어디에 있는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모아둔 볼펜을 사진으로 남겨둔 게 고작이지만, 당시에는 이사할 때 가장 먼저 챙겼던 나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공부할 때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쯤 있다면 참 좋은 일이다. 나는 공부하다 힘이 들면, 서랍을 열어 모아둔 볼펜심을 바라보곤 했다. 내가 올해는 떨어졌지만 노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내가 보낸 시간을 기록하고 공부한 흔적을 남겨둔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공부하고 난 흔적을 기록해두거나 저장해 두자. 본인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흔적은 때때로 나를 위로해 주고, 때로는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