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성의 시간
어느 날은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책도 눈에 안 들어오고 글도 써 지질 않는다.
그럴 때면 공연히 아래 위층을 왔다 갔다 하고 마당을 들락거린다. 은퇴했으니 딱이 일이랄 것도 없다.
마감일에 맞춰 내야 할 논문도, 출판사의 독촉을 받는 저술 작업도 없을뿐더러 취미 삼아 거두는 텃밭에 풀은 안 뽑고 놔두면 그만이다.
러시아 작가로 기억되지만 이름은 모르겠다. 책 제목이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쯤 된다. 평생 자신의 생활을 거의 분단위로 기록한 이야기다. 왜 그랬는지 혹은 그래서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는 잊었지만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다. 또 한 권, 인텔의 회장이었던 글로브가 쓴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 이 책도 편집증에 가깝게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이야기쯤으로 기억한다. 젊어서는 이런 책들을 곁에 끼고 살았다.
해서 지금의 이 좌불안석을 오래된 습관이라고 치부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다.
누구는 부지런한 건 좋은 습관인 데 왜 버리려 하느냐고 한다.
은퇴하고 나니 다정도 병인 양 잠 못 드는 것처럼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다.
우연히 방송에서 뇌과학에 관한 강의를 듣는다. 보통 사람은 뇌의 5~10%밖에 쓰지 못한다는 통설에 대해 젊은 과학자는 단호히 반대한다. 평소에 내 생각과 일치한다. fMRI가 시시각각으로 뇌의 활성화 영역을 찍어대지만 뇌의 가소성은 정지 화면으로 설명되지 못한다.
생각이 이어진다.
평지에서 폭 50센티의 넓이로 좌우로 금을 그어놓고 그 안으로 걸어보라면 일도 아니다. 지상에서 1미터쯤 높여놓고 걸으라 해도 다소 조심스러울 뿐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10미터 쯤되면 어떨까? 100미터 높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같은 50센티의 폭이지만 여분이 필요하다. 뇌도 마찬가지고 삶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창작을 하는 작가들은 일정 기간 숙성의 시간을 갖는다. 평소 자기가 하던 작업과는 동떨어져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엉뚱한 짓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는 완성을 향한 혹은 유레카를 잉태하는 시간이다. 결코 낭비하거나 딴짓 거리일 수 없다.
이렇듯 삶에는 낭비가 없다.
변명인가?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