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해부학 9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6월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에서 응시생 38만 1673명 중 경제 과목 선택자는 5588명으로 1.5%에 그쳤다’(2023년 8월 10일 자, 한국경제 온라인 기사) 지난해 수능에서 경제 과목을 선택한 학생은 1.1%로 조만간 수능 선택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몇 해 전 조사 결과지만 ‘고등학생 100명 중 56명가량이 “10억 원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가도 괜찮다.(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2015년 청소년 정직지수 조사 결과)와 대비해 보면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돈을 버는 데는 경제학이나 경제 원리가 무용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죄의식마저도 뛰어넘는다는 얘기다.
초등학교에서 중고교 때까지, 아니 대학에 가서 조차도 교실마다 붙어 있던 급훈이나 교훈 내지는 건학 정신에는 반드시 정직, 근면, 성실 등이 빠지지 않았다. 해서 속내는 어떨는지 몰라도 부지런히 땀 흘려 일하는 노동 행위를 미덕으로 삼았고 또 자녀들에게도 그리 가르쳐 왔다.
하지만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경제학을 내팽개치고 시장원리와는 동떨어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부로 내몰았는가?
부패 권력, 정경 유착, 성장 중심, 대기업 위주, 승자 독식…. 많은 분석이 난무한다. 하나 이들 원인 분석에는 공통점이 있다. 내가 없다. 나는 아니라는, 그래서 심지어 억울한 피해 의식이 자리한다.
사회적 기업에서 청년 창업 지원에 이르기까지 공적 자금은 눈먼 돈이란 풍문이 나로 하여금 소외된 박탈감을 갖게 만든다. 아마도 이러한 풍조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에 관한 논의를 끝으로 더욱더 공고해졌지 싶다. 게다가 정치적 리더십의 실종 (여기까지. 더 나가면 이 글이 지향하는 탈 정치적 논조를 어기게 된다)까지 가세하니 허탈은 좌절을 넘어선다.
OECD 노인 빈곤율이 압도적 세계 1위인데 이 조차도 시니어들의 잘못이란 말인가? 고 항변하려는 게 아니다. 무력한 은퇴자는 단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나 개탄할 뿐이다.
은퇴 세대는 부모로부터 혼사와 주택 지원을 받던 세대다 반면 우리의 자녀는 결혼과 분리 독립을 자신의 의무로 여긴다. 시니어는 이들이 학창 시절 학비와 용돈 마련을 위해 알바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저 바라만 보던 세대이기도 하다. 이 사이에 갭이 있다. 바통 터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요즘의 소비 패턴을 보면 시니어는 구매력을 주니어는 구매 영향력을 나눠 가졌다. 구글이 메타로 사명을 바꾸며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 코로나와 반도체 전쟁, 챗지피티 등의 출현으로 메타버스의 열풍은 자칫 수그러드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 기술면에서는 인공지능이 유통에서는 블록체인이 일반화 되는 명실상부한 온오프 믹스의 메타버스 구현은 단지 시간문제다.
아마도 그 시점이 바통 터치가 끝나는 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