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해부학 11
요즘 ‘어쩌다’라는 부사가 이런저런 단어 앞에 붙어 유행한다.
그러나 내 보기엔 은퇴자라는 단어 앞에 붙은 어쩌다야 말로 가장 적재적소에 붙은 수식어가 아닌가 싶다.
비록 당사자야 느닷없이 닥친 명퇴라서 경황이 없었다지만 내심 마지막이 가까워 옴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거짓이거나 미래에 대해 일도 관심이 없었다는 뜻일 게다. 단지 그것이 내게는 그리 빨리 부지불식 간에 들이닥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회피성 기대감 때문에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질 뿐이다.
하물며 나처럼 전임강사 취업 후 20년 뒤 모월모일 퇴직이 명시된 사령장을 받은 사람조차도 퇴직은 당혹스럽다. 물론 정년을 몇 년 앞두고부터는 이런저런 궁리와 준비를 아니한 바가 아니다. 문제는 그 모든 생각은 상상일 뿐, 실제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이다.
앞서의 글에서도 한두 차례 밝혔지만 학교에 오기 전 사회에서 여러 차례 이직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럴 때마다 마치 개울물을 건너듯 앞에 놓인 징검다리의 방향이 얼추 맞는지 멀찌감치 내다보았다. 그리곤 앞에 놓인 돌에 앞발을 내딛곤 그것이 기우뚱거리며 불안하지 않은 지 확인한 연후 에야 뒷발을 들어 옮겨 놓을 만큼 나름 주도 면밀하게 징검다리를 건너듯 살아왔다.
그 랬기에 사회에서의 마지막 직장에서 은퇴로 옮기는 발자국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완전히 틀린 생각임을 고백한다. 제대 후 첫 직장에서 대학 은퇴까지는 모두가 사회 속에서의 전환이다. 은퇴 후라고 해서 사회를 떠나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다. 하여 막상 은퇴하고 나니 이 전의 모든 예상과 준비는 전혀 틀렸다는 생각이다.
말 그대로 ‘어쩌다 은퇴자’를 절감하는 순간이다.
‘어영부영 세월만 죽이다 언젠간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였던가?
난, 사회 생활하는 동안 어영부영하지 않았다. 아니, 치열하게 20세기 후반을 살아온 베이비부머 세대치고 누군들 그런 소홀한 삶을 살았으랴! 이는 우리 세대가 잘나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만큼 절실하고 치열한 세월이었음을 의미한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당혹스러운 건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당혹을 돌아본다.
같은 사회 내에 있기 때문에 직장이나 회사라는 조직의 울타리를 벗어났다고 해서 이 만큼 당황스러울 리가 없다. 정작 문제는 공교롭게도 우리 세대가 사회생활을 마치는 시점을 전후해서 세상이 뒤집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총체적으로는 산업사회로부터 후기 산업사회 곧 4차 산업 혁명 시기로의 급격한 이동이 원인이라는 판단이다.
그동안 배운 지식, 갈고닦은 노하우, 평생을 쌓아 온 경험 등등이 일거에 용도폐기 당하는 기분이다. 그렇게 맞이한 은퇴는 말 그대로 어쩌다 은퇴자로 내몰린 느낌이다.
정작 문제는 내몰린 곳에서 주위를 돌아보니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더해서 우리 모두가 젊어서는 상상도 못 했던 초고령 사회를 살아가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닌 족히 2~30년이다.
그 정도 세월을 거꾸로 되짚어 보면 한 창 때의 나이다.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도 길고 아까운 시간이다. 하여, 뭐라도 해야만 한다. 문제는 누구도 답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왜? 초고령 사회는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참고할 만한 인물도 역사도 없다. 이제로부터 내 삶의 흔적이 곧 이 땅의 초고령 사회 역사가 된다. 잘 살고 볼 일이다.
디지털 세상의 젊은이들은 우리 세대의 경험을 건너뛰더라도 이제로부터의 우리 궤적은 어쩌면 저들에게 다소나마 참고가 될 만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