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Mar 07. 2023

보름달 양품으로 오세요~

8년 만에 되찾은 책상, 8년 만의 취업(?)


01

“우리가 월 OOO원을 그쪽 회사에 주잖아요. 그쪽 회사에 그 돈을 주는 대신, 매일 선착순 100명에게 1만 원씩 지급한다. 이런 단순한 이벤트만 해도 지금보다 UV가 훨씬 높지 않겠어요?!”     


OO기업의 OO과장의 그 말,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의 회의실 분위기, 참혹한(?) 낯빛의 팀원들. 심지어 OO과장과 함께 회의에 참석한 OO대리와 OO주임이 상사의 돌발 발언에 좌불안석이던 모습까지.

     

그러니까 OO과장은, 우리 팀이 한 달간 최선은 아닐지 몰라도 최선이길 바라며 만들어 낸 콘텐츠를 대놓고 까고 있었다. 그깟 UV, 그깟 PV가 매월 소폭 상승 혹은 하락을 반복하는 책임을 우리에게 따지는 중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당연히(?) 기분이 나빠야 정상인데 기분은 괜찮았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선 계산기 앱을 켜고 우리가 받고 있는 월비용을 매월 서비스 되는 콘텐츠 개수로 나눠보기 까지 했다.

      

02

OO과장은 잊을만하면 우리를 볶았다. 나와 우리 팀은 망할 UV와 PV 앞에서 매월 조금 기쁘거나 조금 쫄았다. 회의에 들어갈 때면 나는 자주 긴장했는데, OO과장의 이죽거림 때문은 아녔다.  

    

“그러게요. 정말 그렇게 하면 UV하나는 확실하게 잡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 이런 콘텐츠 서비스 따위 그만두고, 오늘부터 바로 <선착순 100명, 1만 원 현급지급>. 그 신박하고 (긍정의 의미로) 미친 이벤트, 한번 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내 입 때문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말릴 새도 없이 머릿속 상상을 내뱉을 것만 같았다. 분명 한 번은 사고를 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OO과장에 대한 반발이나 원망은 없었다. 다만 확인해 보고 싶었다. 공들여 만든 콘텐츠가 단돈 1만 원에 맥없이 질 것이라는 그의 생각. 그런 그의 말에 ‘그래 그래’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 동의하고 있는 자존심도 뭣도 없는 나의 이 어처구니없는 속내. 

     

그때부터 ‘팔리는 콘텐츠’에 관심이 생겼다.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로 ‘나의 가치를 알아서들 찾아오라’는 태도로 콘텐츠를 만들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읽는 사람이 나와 팀원들, 관계자 몇몇과 약간의 고객이라면 그게 무슨 돈낭비, 자원낭비!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팔리기만 한다면 제대로 팔 수만 있다면 우아 따윈 집어던질 수 있는 사람이 박선영이 아닐까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나라면... 걸리적거리는 하이힐 따윈 벗어던지고 맨발로 라도 나서지 않을까? 


'그래, 나는 그런 부류의 에디터이자 기획자인 거야. 잘 만들고 싶은 만큼, 잘 팔고 싶은.'   


03    

면접장에서는 역시나 회사 이름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보름달 양품이... 어떤 의미인가요?”     


OO과장과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글’은 내게 ‘상품’이며, 나는 그것을 잘 만들어 잘 팔고 싶다 말했다. 질 좋은 물건을 의미하는 양품을 회사이름으로 가져온 이유다.

     

보름달은 아이를 키우며 깨달은 나의 한계와 도전을 동시에 상징하는 단어다. 아무리 기를 써도 아차 하면 형편없는 어른이 되었다. 다섯 살 아이 하나 감당 못해, 두 주먹 불끈 쥐며 ‘주먹이 운다라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지 (야!!!!라고 소리 지르지 않으려고), 잇몸이 시큰한 밤이면 그런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변명처럼 찾아낸 문장이 어른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문장 하나로 세상 마음 편해졌다. 내가 나이만 어른이지, 사실상 진정한 어른이 아님을 인정하고 나니 날아갈 것 같더라. 보름달이란 세 글자 뒤에 숨겨진 나만 아는 문장이 하나 있으니... “차오르는 중입니다.”     


내 글이 최고가 아님을 안다. 나의 기획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반짝거리는지도 나는 잘 알지. 


어떤 날의 박선영은 초승달

어떤 날의 박선영은 상현달

어쩌다 한 번쯤 보름달인 날도 있진 않을까.


 우쭐거릴 때도 있겠지만, 일을 대하는 내 마음은 언제나 보름달을 향해 채워가는 중이라는 다짐의 마음을 담은 단어 보름달. 그래서 나의 회사 이름은 보름달 양품.


보름달 양품의 정체성은 여전히 만들어가는 중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일단 출판업으로 첫걸음을 내딛는다는 것.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을 주로 팔지만 ‘품질’에 있어서 만큼은 책임 지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 그래서 보름달 양품에서 선보일 첫 책은? 흐흐흐, 가을에 공개됩니다.

    


저는 취업이 아닌 창업(?)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출판 관련 예비 창업자 및 1인 출판사를 대상으로 하는 파주출판도시 창업보육센터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공유오피스에 입주합니다.


2015년 퇴사 이후 8년 만에 생긴 나의 책상이 가장 반갑습니다. 나를 위한 책상 하나를 되찾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밀크티 6,000원. 

초코라테 5,500원. 

3시간 이상 자리 차지 하면 미안하니까 

베이글과 크림치즈 추가 5,500원. 


카페에서 머리로 덧셈 뺄셈 하는 대신, 마음 편하게 있을 내 공간이 생겼다는 게 이렇게 들뜨는 일이었네요. 동시에 비슷한 일을 하는 동료가 생긴다는 사실도 살짝 설렙니다.     


면접순서를 기다리며 수첩에 감사한 분들의 이름을 썼어요. 얼마나 많은 이름이 끝도 없이 등장하던지.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합격 문자를 받은 후, 수첩의 감사한 분들 제일 마지막에 OO과장님의 이름도 썼습니다. 


"OO과장님 감사해요. 과장님의 <선착순 1만 원 이벤트 아이디어> 덕분에, 그냥 그저 쓰던 박선영이 팔리는 글을 고민하는 박선영으로 자랐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질문이 고맙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