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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현진 Nov 26. 2021

숙성된 논픽션의 깊은 맛

<블랙 호크 다운>, 마크 보우든

 훌륭한 논픽션은 시간을 들여 숙성시킨 맛 좋은 음식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흘러야 깊이가 있다. 팔팔 뛰는 현장을 즉석에서 요리하듯 글을 쓰면,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어딘가 부족하다. 적당한 시간이 중요하다. 너무 오래 되면 썩기도 한다. 취재 자체가 어렵다. 이야기가 적당히 무르익는 시점을 알고 충실히 준비한 뒤 내놓는 논픽션은 대체로 훌륭하다. 기다림이 가장 어렵다. <블랙 호크 다운>은 그런 훌륭한 논픽션의 전형이다. 

 우선 영화 이야기부터.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은 현대전(戰)을 다루는 대중문화 콘텐츠의 판도를 바꿔놓은 명작으로 꼽힌다. 1993년 10월3일, 소말리아 반군 지도자를 체포(납치)하는 작전을 벌이기 위해 현지에 주둔 중인 미군 특수부대 델타포스 대원들이 헬기를 타고 수도 모가디슈 중심가에 침투한다. 중무장 헬기인 ‘블랙호크’가 재래식 무기에 격추돼 추락하고, 도심 한가운데 부대원이 고립된다. 부대원들이 구조되기까지 이틀간 19명의 미군이 죽었고, 1000여명의 소말리아인들이 죽었다고 한다. 

 사실적인 전투 장면과 적진에 고립된 부대원들에 대한 캐릭터 묘사가 이 영화의 백미다. 쉼 없이 터져나오는 총성, 부대원들과 지휘부가 주고받는 무전들, 금방 돌아올 작전이라 생각해 보급품과 방탄복, 야간 투시경 등 장비를 챙기지 않은 부대원들. 디테일한 묘사 덕에 쉽게 들여다 볼 수 없는 전쟁의 다양한 얼굴을 보게 된다. 

 영화에 묘사된 인물, 상황, 무전의 교신 내용, 작전 상황 등은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의 기자 마크 보우든은 당시 작전을 취재해 재구성했다. 작전이 벌어진 뒤 2년 반이 지난 1996년 보우든은 취재를 시작했다. 그 결과물은 1997년 11월 필라델피아 인콰이어어를 통해 29편의 시리즈 기사(Chapter 1 보기)로 보도됐고 1999년 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의 포스터 

■20년차 기자가 뽑아낸 논픽션의 깊은 맛 

 보우든은 원래 1992년 시작된 미국의 소말리아 파병을 전반적으로 취재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20년 넘게 신문기자로 일한 보우든 방대한 주제로 ‘모든 걸’ 이야기하려 한다면 결국 독자들이 외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군 파병의 전반적인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이 작전에 집중한다. 

 문제는 취재였다. 보우든은 처음 미국방부의 홍보실에 접촉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인터뷰를 신청한 대원들은 언론과의 접촉이 금지된 특수부대원이었다. 난관에 부딪혔다고 생각한 순간 길이 열렸다. 대원 중 한명과 연락이 닿았고, 그를 통해 전투에 참가했던 부대원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다른 부대원을 소개해줬다. 

 보통의 기자들은 이 지점에서 인터뷰를 엮어 기사를 썼을 것이다. 한국이었다면, 참전 대원들의 ‘단독 인터뷰’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보우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취재를 시작할 때부터 목표가 ‘드라마틱한 전투 기사를 쓰는 것’이었다. ‘드라마틱’, 즉 극적인 기사를 쓰려면 필수적으로 장면 묘사와 대화, 긴장감을 주는 스토리 구조가 필요하다. 수십명을 인터뷰했다고 해서 그 말이 정확한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고 결정적으로 장면을 묘사하는데 한계가 있다. 

 보우든은 소말리아에 직접 간다. 모가디슈에 도착해 전투가 있던 거리를 둘러보고 미군과 싸운 현지인들을 인터뷰했다. <블랙 호크 다운>에는 소말리아 반군의 시선에서 쓰여진 전투 장면도 등장하는데 현지 취재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모가디슈에서 돌아온 시점이라면 전투가 벌어진 현장을 적절히 묘사한 뒤 대원들의 인터뷰를 버무려 나름대로 현실감 있는 기사를 쓸 수 있었을 테다. 보우든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군 장교들을 만난다 . 

 미군 장교들은 소말리아인의 관점을 궁금해 했는데, 모가디슈를 다녀온 보우든은 그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다. 보우든도 이 책의 에필로그에 적어두었지만 “현장에서 발로 뛰어다닌 작업의 결과”였다. 그리고 귀중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15시간 동안 전투 장면을 여러각도에서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가 있었다. 전투 중의 무선교신과 녹취록도 보존돼 있었다. 그가 책에 쓴 대화는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 게 아니라, 실제 주고 받은 대화를 그대로 적어둔 것이다. 부대원들의 서면진술서 등 ‘문서기록’도 있었다.

 보우든이 3년 이상 지난 시점에 쓴 기사는 가장 깊이 있는 전투의 속살을 담아냈다. 작전 실패로 끝난 전투 직후, 전 세계에서 몰려든 취재진이 뉴스를 쏟아냈지만 그보다 생생하다.

  보우든이 일간지 기자로 쓴 시리즈 기사는 당장 주목받는다. 그가 취재한 다양한 자료(사진, 음성, 영상, 그래픽 등)를 활용한 온라인 버전 기사가 홈페이지에도 게재했다. 당시로선 생소한 시도였다. 이후에 책이 됐고 영화가 됐다(흥행도 했다). 영화가 됐다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는 뜻일 것이다.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된다. 보우든은 <블랙 호크 다운>으로 명성을 얻게 됐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논픽션 작가로 꼽히게 됐다. 


■우리에게 없는 논픽션

 <블랙 호크 다운>의 미덕은 '미군의 군사개입' 같은 거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우든은 에필로그와 후기를 통해 어떤 취지로 이 기사를 취재하고 어떤 의도를 담아 글을 썼는지 소개한다. 정작 전투 장면을 세밀하게 그린 본문에선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전투의 상황을 충실히 재현하고 독자들이 끝까지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정교하게 구조를 설계했을 뿐이다. 한국의 사회부나 정치부 기사에 비유하자면, 그러니까 보우든의 글은 29편짜리 ‘야마’(주제) 없는 기사인 셈이다. 그렇지만 모든 이야기를 읽은 뒤에는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독자들은 각자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끝까지 읽히지도 않고 야마도 기억나지 않는 한국의 기사들과는 다르다. 

 국내에서 이런 논픽션을 찾아볼 수 없는 건 왜 그럴까 고민했다. (가벼운 에세이나 자기개발서, 출입처나 관련 주제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자기 생각을 써놓은 글이나 책은 여기서 다루는 '논픽션'이 아니다.) 한국의 기자, 작가가 쓴 정교하게 짜여진 내러티브 논픽션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내러티브를 쓸 사람은 기자이거나, 취재기술이 있는 논픽션 작가일 텐데, 보우든처럼 장기간 취재하고 소말리아까지 갈 수 있도록 지원받기란 한국의 기자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보우든은 한 인터뷰에서 1960년대 미국의 ‘뉴저널리즘’ 황금기를 수놓은 기자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톰 울프, 게이 텔리스, 조앤 디디온 등 소설 작법을 취재 기사에 적용한 뉴저널리즘의 기수들이 10대 시절 그의 영웅이었다. 그는 그로부터 수십년 동안 기자로 훈련받고그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런데 국내에선 2021년 현재에도 내러티브, 뉴저널리즘, 논픽션 같은 말을 하는 것만으로 혁신적인 시도를 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여러모로 아쉬운 지점이다. 

 어찌 됐건 보우든은 이런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블랙 호크 다운>을 쓴 뒤엔 ‘Killing Pablo’(파블로 죽이기)라는 책을 출간하다. <블랙 호크 다운>을 취재하며 알게 된 군장교를 통해 콜롬비아의 범죄조직 메데인 카르텔과 그 리더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추적한 이야기를 듣게 돼 취재했다고 이야기 한 걸 한 인터뷰에서 들은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이후에 넷플릭스의 드라마 ‘나르코스’로 이어졌다. 책으로 나온 게 2001년, 드라마는 2015년 첫 시즌이 공개됐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든 훌륭한 논픽션은 유통기한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진가가 드러난다. 우리도, 아니 나도 이런 논픽션을 쓸 수 있을까. <블랙 호크 다운>을 교과서처럼 다시 들춰본다. 

'블랙 호크 다운'을 쓴 마크 보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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