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리스 Dec 06. 2021

취재의 시간

<노랑의 미로>, 이문영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기자들은 불만이 많다. 연차가 높으나 낮으나 마찬가지다. 늘 입이  나와 다. 경험상 가장 큰 이유는 '시간' 때문이다. 쪼들리는 시간을 쪼개 취재와 기사 쓰기를 모두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쪽저쪽 다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데스크나 취재기자나 사정은 비슷하다. '아, 시간만 더 있었으면..' 이 불만은 발바닥이 뜨겁선배들 취재에 불려 다니는 막내일 때 가장 커지기 마련데, 이런 이유로 사회부 시절 내 입은 늘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부장,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아 뭐가 나올 것 같은.." "우리 이기자님께서 무슨 대단한 특종을 하시려고 그러시나..? 그냥 빨리 보내!" 막내 시절 나의 공격적인 꿈틀거림(?)은 부장 빈축에 손쉽게 제압되곤 했다. 시간만 있으면 다를 것 같았다. 세상을 바꾸는 대단한 특종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언론계 은어로 '얘기되는' 기사를 척척 내놓을 수 있을 텐데,라고 종종 생각했다. 그 시절 삐죽 나온 내 입에선 "시간만 더 있었으면.."이 툭툭 튀어나왔다.


이문영 기자가 쓴 <노랑의 미로>(2020)는 장장 5년에 걸친 취재 결과물이란 점에서 기자들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내가 '이문영'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탐사보도팀에 있을 때였는데, "시간 좀 달라"는 내 궁시렁에 지쳤는지 부장은 편집국장으로 승진하자마자 "이제 그만 괴롭히라"며 나를 갓 만들어진 탐사팀으로 내쫓았다. 이때 앞선 기자상 수상작들을 연구하면서 그가 쓴 기사를 보게 됐다.


일간지 기자가 보기에 그의 기사는 조금 독특다. 호흡 다르달까. 첫 문장은 늘 이런 식이다. '살아남았어도 살아남지 못했다.'(살려고 오른 세상 꼭대기…‘지붕 위 그 소’는 어떻게 됐을까), '죽은 불이 여전히 삶을 태우고 있었다.'(“산불 두 달 됐는데 해결된 게 뭐이가…아직도 불냄새가 나”), '나는 혼자 죽어 이 방에 모여 있다.'(무연으로 떠난 영혼들은 납골당에 와서야 인연을 얻었다) 관념적이고 문학적이다.



그의 기사는 늘 놀라울 정도로 다. <노랑의 미로>는 한겨레21에서 2015년 연재한 <가난의 경로> 시리즈가 원작격이다. 철거 통보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동자동 쪽방 건물 속 45명의 삶에서 '가'이라는 공통분모를 길어올렸다. 1년 넘게 연재된  시리즈는 간지라는 점을 감안해도 분량이 압도적. 하나의 기획에 그 같은 시간과 면을 투자했 것 놀라운데, 거기다 4년라는 시간 더해  나다고 하니 나 같은 평범한 기자는 입이  벌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나는 기자들이 남 기사 볼 때 으레 그렇듯 그의 기사를 정성 들여 읽지 않았고, 기사 용 전부가 '진짜'일 것이라 믿지 않았다. '기사가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건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더욱이 그는 관념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듯 보였는데, 이를테면 '벽에 지름 10cm 정도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를 '벽에 붉은 피멍이 들었다'고 쓰는 식이었다. 기자들이 의식적으로 피하는 투다.


노랑의미로(2020)


<노랑의 미로>도 비슷한 인상이었다. 이 책 첫 장에선 고독사한 시체에서 태어나 버려지는 이불에 있다가 방바닥에 떨어지는 구더기 한 마리가 나온다. "말았다 펴는 힘으로 뒤집힌 몸을 바로 잡은 뒤 몸을 감출 구석을 찾아 필사적으로 기어가는" 이 구더기는 나의 의심에 기름을 부었다. 이것은 논픽션인가. 이 장면을 도대체 어떻게 취재했다는 것인가. 스물스물 피어오른 의문이 꼬리를, 다시 꼬리를 물었다. 생각을 관두고 책을 덮었다.


아마 이런 박한 평가에는 질투심 비슷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시간'이라는 값비싼 재료를 팍팍 털어 넣은 값비싼 취재물을 보고 있자니 괜히 아무렇게나 깎아내리고 싶어는 마음이랄까. '이거, 무리 봐도 논픽션 같지 않은..' 이렇게도 생각했다. ', 누구나 시간만 있으면 이 정도는..' 하지만 이런 모나고 비열한 생각은 그를 직접 만나게 되면서 조금 달라졌다. "내러티브 기사(논픽션)를 연구해 보자"며 비슷한 연차 기자들이 모인 연구회에 그가 일일강사로 찾아오면서다.


사실 나는 그를 부르자는 제안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그의 미적인 기사는 물론 독보적인 것이지만 큰 틀에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기사를 '내러티브 기사'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논픽션쓰기>, 잭 하트

 

당시에 읽던 <논픽션 쓰기>(2011)의 영향이 컸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오레고니언>에서 25년간 편집장으로 일하며 퓰리처상 수상자를 다수 길러 낸 잭 하트가 쓴 이 책은 미국에서 내러티브 기사의 교과서로 통한다. 요지는 '구성'이다. '발단-상승-위기-절정-하강'이라는 내러티브 포물선 안에서 여러 카메라 숏으로 잡히는 등장인물들은 갈등과 시련으로 이뤄진 플롯의 징검다리들을 건너 마침내 이를 극복한다. 그래서 내용은 비극보단 희극이 낫다.


그에 따르면, 훌륭한 내러티브는 인물, 사건, 장면이 중심축을 이루며, 장면 설정의 힘은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데려가 내러티브 포물선에 오르도록 하는 데 있다.


'이문영 기사'들은 달랐다. 내러티브 포물선이나 극적 긴장감 같은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문장에 감탄이 절로 났지만, '고지'까지 독자들을 끌어당기며 고삐를 조였다 푸는, 수축과 이완의 묘미가 없다. 기사 톤도 늘 우중충하고 어둡다.


"저.. 말이 길어질 것 같아 PPT를 조금 준비해 왔는데요." 렇게 아무런 기대 없이 만나게 된 이문영 기자는 크지 않은 체격에 안경 너머로 약간 수줍은 눈빛이 흘러나오는, 조용한 분위기를 가진 중년의 기자였다. 회사에서 흔히 보는 그런 선배 느낌은 아니었다. 그가 그날 준비한 주제가 이 책, <노랑의 미로>였다.


기사연구회를 찾은 이문영 기자

기자일로 밥벌이하면서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 않게 됐다고 자부하지만 그날 그의 얘기를 들으며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사람이 취재에 이렇게 공을 들일 수 있다고?' 취재 보따리를 하나둘 풀어는데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사진은 책 중간쯤 나오는 장면이구요. 이 사진은.." 그는 수년간 매일은 아니지만 매일 같이 동자동에 얼굴을 비추며 가난을 관찰했고 기록으로 남겼다. 어느 기자 말마따나 그는 "벽에 붙은 파리"처럼 그 건물에, 그 안의 사람들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책이, 그의 얼굴이 새롭게 보였다.


눈을 비비고 나니 일단 라포(rapport)가 눈에 들어왔다. 기자 한 명이 취재원 45명의 인생 구석구석을 훑는 것,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나하나가 드라마고, 영화고, 다큐다. 그 산더미 같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듣고, 정리하고, 쓴다는 것인가. 그것도 혼자. 설득도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범죄를 법보다, 죽음을 삶보다 가까이 두고 살았다. 이런 내밀한 이야기들을 생면부지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일, 털어놓으라 설득하는 일,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설득까진 그렇다쳐도 듣는 것이 고역이었을 것이다. 내가 탐사팀에 들어가 새삼 깨닫게 된 건 기자 일의 본질은 남의 말을 듣는 것이고 남의 말을 장시간 듣는 일은 정신건강에 대단히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규모가 큰 기사는 사람 한둘 만나는 걸로는 절대 쓸 수 없다. 십수명, 수십명이 쏟아내는 '말폭탄'을 활자로 다시 바꾸는 일은 좋게 말해 막노동이었다. 1시간을 인터뷰하면 녹음을 푸는 데 2시간이 걸렸다. 인터뷰가 길어지면 걱정부터 들었다. '아, 제발 그만..'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취재를 자랑하고 싶은 건 기자라면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렵게 수집한 사람들의 가난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는다. 보여 뿐이다. 동자동에서 시끌벅적했던 사람들은 동자동을 벗어나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됐다. 동자동으로 다시 돌아와서야 '보이는 사람'이 됐다. 저자가 45명의  박박 긁어다 찰흙처럼 뭉쳐놓은 건 뭉쳐야만 보이는, 심코 보면 말끔히 사라 가난의 속성을 기 때문일 것이다.


"글쎄요, 내러티브 포물선? 그런 걸 염두에 둔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방법도 모르겠네요."


그가 곡예 부리듯 서사비틀거나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연출하지 않았던 건 그의 말처럼 방법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그는 이 책이 지금 시대 가난이 담긴 사료(史料)가 될 것이라 보았던 것 같다. 실제로 그의 인상은 넉살 좋은 이야기꾼보다 꼼꼼고 깐깐한 역사가 쪽에 가까다. 그의 곤조곤한 말투와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간'에 있어 그는 몹시 초연다. 그에게 취재는 "한 달, 두 달.. 1년, 2년.. 포기하지만 않으면 완성되는, 조금씩 모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음 들어보는, 선 방식이었다.


그 말이 당시의 내게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선명하다. 의기양양 들어간 탐사팀에서 연거푸 졸작만 내놓으며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라는 뼈아픈 사실을 몸소 증명했던 터라 더 그랬던 것 같다. 해보니 알았다. 이런 기사는, 책은 기자라고 아무나, 시간만 많다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책을 다시 보고 한동안 이러고 다녔던 것 같다. "한겨레 이문영 선배라고 알아? 완전 대박이야." "<노랑의 미로> 봤어? 안 봤다고? 꼭 봐봐." "언젠가, 우리도 그런 취재 해보는 날이 오겠지?" "나 이문영 같은 기자가 될거야." 지금도 잊을 만하면 꺼내는 말이다.

이문영 기자


매거진의 이전글 숙성된 논픽션의 깊은 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