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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현진 Jan 16. 2022

저널리즘에 자신을 잃어간다

<기자와 살인자>, 재닛 맬컴



 "기자라면 누구나, 너무 멍청하거나 오만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가 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음을 안다."


 2017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이 첫 문장에 눈길이 갔다. 이후에도 가끔씩 이 문장을 떠올려 보곤했다. 인용할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했다. 기자 생태계를 꼬집는 멋진 인용구 하나를  얻었다 생각했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기자 생활을 시작한지 몇해가 지난 뒤였고 왠지 모를 우월감을 느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이 들고는 한다. 


 책 이야기부터 하자면, <기자와 살인자>는 연달아 벌어진 매력적인(얘기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1970년 2월, 미군 군의관이던 제프리 맥도널드는 자택에서 임신한 아내와 어린 두딸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군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맥도널드는 이후 또 다시 열린 형사재판(항소심이 열린 듯하다)을 받고 있었다. 


 1968년 스물여섯살 때 데뷔작으로 큰 성공을 거둔 조 맥기니스는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만회할 기회를 찾지 못하던 맥기니스는 1979년 어느 날 맥도널드를 만났다. 자신의 입장을 책으로 써줄 작가(기자)를 찾고 있던 맥도널드가 먼저 제안했다. (책에서 작가는 사실을 바탕으로 책을 쓰는 '논픽션 작가'를 가리키며 큰 틀에서 저널리스트라는 맥락으로 사용돼 이 글에선 작가, 기자를 저널리스트라는 의미로 혼용한다.) 


 맥도널드와 맥기니스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그러니까 다른 기자나 작가의 접근을 배제하고 핵심 취재원인 맥도널드에게 작가인 맥기니스만 접근할 수 있는 계약을 맺는다. 맥기니스는 책의 내용을 맥도널드에게 알릴 의무는 없었다. 


 맥기니스는 데뷔작 <The Selling of the President>에서도 이런 취재 방식을 채용했었다. 닉슨 대통령의 선거 캠프에 잠입해 캠프의 홍보 전술을 폭로한 책인데, 그는 공화당원도, 닉슨의 지지자도 아니었지만, 캠프 관계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고 자신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비밀스런 홍보 전략을 마음껏 취재했다. 이런 기법을 그는 맥도널드에게도 적용하려했던 것이다. 

조 맥기니스(왼쪽)와 제프리 맥도널드.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맥도널드가 수감된 뒤에도 취재는 이어졌다. 맥기니스는 재판 전후 4년 가까이 맥도널드를 취재하면서 기자이기보다는 그를 위로하는 친구였다. 가장 가까이서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한 편이기도 했다. 맥도널드가 수감된 후에도 수많은 편지가 오갔고, 맥기니스는 맥도널드의 가족을 만나고 그의 집을 찾아 사적인 이야기들을 수집했다. 책 <치명적 환영> 이 출판될 때까지 맥기니스는 그 내용을 맥도널드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계약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맥기니스는 유죄 판결을 받은 그를 위로했고 함께 분노하는 마음을 편지에 쓰기도 했다. 하지만 맥기니스의 책은 맥도널드의 예상과 달랐다. 맥도널드가 마주한 건 잔혹한 싸이코패스 살인마로 자신이 묘사된 친구의 책이었다. 맥도널드는 이 책의 내용을 다른 언론과 교도소에서 인터뷰하는 중간에 전해듣게 되었다고 한다. 신뢰의 크기만큼 배신감도 큰 법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었을 것이라 믿은 친구의 배신. 맥도널드는 맥기니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렇게 시작된 재판에서 저널리즘을 둘러싼 미신과 암묵적 규범들이 심판대에 오른다. 기자는 취재원에게 항상 진실돼야 하는가. 취재원의 답을 끌어내기 위해 거짓된 믿음을 심어줘도 되는 것일까. 인터뷰에 나서는 이들은 왜 기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기자는 인터뷰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더라도(입을 닫아버리게 될지라도) 상대를 공격하는 의심 가득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일까. '진실을 알린다'고 할 때 진실은 누구의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진실이기는 한 것일까. 


 이 책을 쓴 재닛 맬컴은 맥기니스와 맥도널드, 그의 변호인,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 다른 작가와 전문가들, 배심원 등 다양한 이들을 취재하면서 이런 의문을 풀어간다. 친구에서 원고와 피고로  재판에서 마주한 기자와 살인자.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맬컴은 근복적인 저널리즘의 윤리에 의문을 던진다. 


 재판에선 맥도널드가 승리했다. 임신한 아내와 두 딸을 죽인 잔혹한 살인자와 살인자를 친구로 믿게 한 뒤 배신한 기자를 두고 소송의 배심원 대다수는 살인자의 편에 선다. 맥기니스가 출판으로 벌어들인 돈을 맥도널드에게 배상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됐다. 맬컴은 재판이 마무리된 뒤 억울함을 토로한 맥기니스 측의 편지로 취재를 시작했고, 쉽게 풀어내기 어려운 윤리적 고민들과 마주한다.  


 이 책에는 '비진실'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맥기니스의 취재 방식이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증명하겠다며 한 논픽션 작가가 피고 측 증인으로 재판에 나섰다. 맥기니스는 맥도널드가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자신이 맥도널드가 무죄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기 위해, 친구인 것처럼 행동하고 말해왔다. 맥도널드 측은 이것이 통상적인 취재의 방식이 아니라며 몰아세웟다. 그러면서 그런 행동은 거짓말이며 증언에 나선 작가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느냐고 캐물었다. 이 작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고 비진실을 말했다"고 답한다. 


 작가는 거짓말은 악의를 품거나 잘못인 줄 알면서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비진실에 대해선 "실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의 일부"라고 말한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면댄 말'을 가리키는 거짓말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개소리다. 변호사는 이런 작가들의 태도를 비웃는다. "(거짓말이 뭔지에 대해) 제 어머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잘 가르쳐줬을 텐데요." 


 기자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 말한마디 해주지 않으면 기사로 쓸 수도 없다. 그래서 너무나 뻔한 기사의 주제를 굳이 '교수' 등 전문가의 입을 빌려 전한다. 제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재원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득에 진심이 언제나 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앞에서 리뷰한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진심을 이해한 사린 가스 피해자들이 있었다. 반면, 맥기니스는 살인범으로 여겨지는 남성의 환심을 얻어 그의 깊숙한 내부로 들어가려 한다. 그의 진심을 전하는 순간 살인범(맥도널드)은 입을 닫고 떠나거나 얼굴에 주먹을 날릴 것이 뻔할 뿐이다. 


 그래서 "수사가 엉망이었던 것 같다" "재판에 문제가 있다"며 공감을 나타낸다. 맥도널드는 이것보다 더 나아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다. 함께 먹고 자며 지냈고 변호인단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이것은 거짓이고 사실을 다루는 기자에겐 비윤리적이라는 게 배심원들의 판단이었으리라. 

조 맥기니스가 제프리 맥도널드를 취재해 쓴 책 <치명적 환영>

 고백컨데 나에게도 이런 취재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절반의 진실 - "억울한 부분이 있겠네요 (당신 결백하다는 건 아니지만)" -을 이야기하며 다가갔던 일들.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사례도 있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일도 있었다. 


 이런 취재는 결국 '나는 당신의 편이다, 나를 믿어라'라는 메세지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전달하느냐에 성패가 갈린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며 다가오는 기자들을 쉽게 거절하지 않는다. 취재원들은 (예외없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기자를 이용할 방법을 고민한다. 기자들도 그런 심리를 이용해 기삿거리를 찾는다. 저널리즘의 본질은 어쩌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자들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계속해서 외면하려던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그 순간이 다가오면 나는 성실한 친구로 남거나 음흉한 배신자(그러니까 기자)가 되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한다. 취재원에게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던 본질("당신은 나쁜 놈이야")을 글로 써야 하는 것은 괴롭다. 이런 일을 통쾌하다고 여기며 기사를 읽고 항의하는 취재원에게 "내가 언제 거짓말 했냐"고 하는 이들이 참 기자다. 맬컴도 이렇게 말한다. "..기자들은 각자 기질에 따라 온갖 방법으로 그들의 배신 행위를 정당화한다. 오만한 부류는 언론의 자유와 대중의 알 권리를 들먹이고, 재능이 없는 자들은 예술성을 내세우며, 그나마 덜 빤빤한 자들은 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이라고 털어놓는다." 


 저널리즘을 둘러싼 이런 갈등은 취재원과 기자 사이를 넘어 확장된다. 결국 기사를 읽는 건 이런 맥락을 모르는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가장 믿을 수 없는 직업이 됐지만, 그래도 기사와 글을 읽는 순간, 기사 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는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 된다. 


 비윤리적인 취재에 대한 의문은 흡사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은 증거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독수독과'의 원리를 떠오르게 한다. 비윤리적 취재의 결과물은 진실성을 인정해선 안 되는 것일까. "불법이 아니라 괜찮다"는 말이 가장 괴상한 답일 텐데, 기사는 법률문서가 아닌데다가, 법정이 아닌 도덕률이 지배하는 대중에게 던져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도덕한 취재, 취재에 들어가기도 전 취재원을 설득하려는 과정에서 거짓된 행동을 했다면 그런 것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들이 남는다. 


 맬컴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저널리즘에 진실성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인터뷰 대상의 눈먼 자아도취와 기자의 회의주의 사이의 긴장이다. 인터뷰 대상의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옮겨 출판하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라 홍보 매니저다"라고 말한다. 결국 불편하다는 핑계로 비판적 시각을 잃어서는 안 되며, 처음부터 진실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이 인용문 자체가 '멋진 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막상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조금 서늘해진다. 어렵게 신뢰를 얻은 취재원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글은 불편함과 곤람함을 피하기 위해 타협해낸 비진실의 결정체였는지 모른다. 나는 원인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치장했다. 나는 멍청하거나 오만한 기자 중 어느 쪽이었을까. 맬컴이 보여준 것처럼 논픽션이 허영과 배신의 거래 뒤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결국 그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자신을 잃어간다.  



<기자와 살인자>를 쓴 재닛 맬컴. 미국 뉴요커 기자인 그는 '뉴저널리즘'을 대표하는 르포기자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책은 저널리즘의 윤리를 다루는 필독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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