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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ihnK Sep 16. 2023

나는 초등교사를 그만두었다.

8. 잘하면 잘할수록-2

문제는 곧 2년 차를 목전에 둔 시점에 발생했다. 새로운 학년도가 시작되기 직전 2009년 2월이었다. 내가 잘 모르는 사이 겨울방학 기간 동안 학년 배정과 업무 배정이 이루어졌다. 신규들은 신규교사 추수 연수에 의무 참여해야 했으므로 학년 배정이나 업무 배정에 아무런 관여를 할 수가 없다. 단지 방학 직전에 업무희망서를 각자 작성여 제출하는데 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담임 희망서에 나는 정확한 순서는 기억이 안 나지만 6학년과 1학년이 가장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5 지망 6학년, 6 지망 1학년을 써낸 것은 기억이 난다. 업무는 기존에 했던 '학부모회' 업무를 적어 제출했다. 그때는 이 서류가 당연히 유의미한 서류인 줄로만 믿었다.


개학을 앞두고 업무 인수인계를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지난해 5학년 담임이었는데 이번에는 6학년 담임이라고 한다. 6학년은 5 지망이었어서 생각도 못했다. 2,3,4,5학년 1 지망에서 4 지망까지 내 자리가 하나도 없다고? 많이 당황스러웠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이렇게 담임 배정이 되기도 하나요? 이렇게 되면 작년에 가르쳤던 아이들을 또 가르치게 되는데요."


새로운 교무부장 선생님은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렇다고? 누가 이마에 6학년 담임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래? 같은 애들 또 가르칠 수도 있고 그렇지 뭐."


라고 말씀하시며 자리를 뜨셨다. 이마에 6학년이라고 써 붙이다니. 나야 6학년이든 몇 학년을 가르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은 없었다.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신규교사이니 실수가 잦았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고, 6학년은 졸업 전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데 초짜 선생님보다는 좀 더 연차가 있는 선생님들을 선호하기 마련일 테니.


"나는 6학년이 1 지망이었는데 3학년 담임이 됐어."


발령동기들끼리 회의가 끝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기간제로 6학년을 해 봐서 6학년을 1 지망으로 썼다고 했다. 내가 3학년 담임이었다면 좋았을 걸. 업무희망서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회의에 들어간 자들의 마음대로 결정이 나는구나.'


작년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 업무 부탁을 할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6학년 담임이니 업무라도 쉽겠지. 기대하며 업무 분장표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내 이름 세 글자를 찾아보고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업무가 4개도 아니고, 자그마치 4줄이었다. 업무가 20 여개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전교에서 내 업무 개수가 가장 많았다. 멀리서 딱 봐도 표의 위아래 칸 넓이가 제일 넓다. 회의가 끝나고 교감선생님을 찾아가서 조용히 말씀을 드려보았다.


"교감선생님 제 업무는 왜 이렇게 많은가요? 6학년 담임인데 업무가 과중한 것 같습니다."     

"이 업무들이 많아 보여도 다 쉬운 일입니다. 충분히 다 할 수 있으니 배정한 것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책임감이 크거나 업무강도가 높은 일은 없었다. 내 업무를 설명하자면 기존에 하던 학부모회 업무가 교무부 업무라 같은 부서 업무인 학교 행사 업무를 넣은 것이라 했다. 그리고 어차피 행사 때마다 참여해야 하니 방송 업무도 내 것, 행사를 하면 사진을 찍어야 하니 행사 사진 촬영 업무도 내 것, 사진을 찍으면 어차피 정리해야 하니 교력 만들기 업무도 내 것, 행사 사진은 어차피 홈페이지에도 탑재해야 하니 홈페이지 관리 업무도 내 것, 홈페이지 관리와 연관성이 깊으니 학교 홍보 업무도 내 것, 홈페이지 관리와 비슷하니(?) 사이버 가정학습 관리 업무도 내 것, 작년에 하던 일이니 걸스카우트 업무도 내 것인데 작년에 해 본 것이니 이제는 청소년 단체 총괄 업무도 내 것이라 했다. 게다가 내 업무는 교무부, 정보부, 체육부 업무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있었다.




3월 2일 개학식. 방송 업무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다행히도 작년 5학년 아이들이 작년 6학년에게 잘 배워두어 자연스럽게 잘 시작하였다. 특별한 방송 프로그램을 하는 것은 아니어서 단순하게 애국가, 국기에 대한 경례 음악이나 잘 틀고, 마이크와 카메라만 정상작동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애국조회는 매주 월요일에 방송조회가 있었으므로 월요일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여 방송실에서 방송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학교 행사는 매주 또는 매달 있었다. 나는 교무부장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월중행사계획을 참고하여 기록되어 있는 모든 행사에 참여하여 사진을 찍어야 했다. 찍은 사진 학교 외장하드에 정리하여 저장하고, 사진을 편집해서 교력을 만든 후, 인쇄해서 클리어파일에 넣는다. 그 사진들을 홈페이지 행사 게시판에 탑재하고, 행사 내용을 간략히 적는다. 간혹 우리 반 수업 시간과 겹치는 행사도 있었는데 그럴 때에도 잠시라도 가서 사진을 찍어야 했고, 만약 깜빡하고 교실에 있던 날에는 수업 중에도 전화로 갑자기 호출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학급 아이들을 잠시 자습시켜 두고 교무실에서 카메라를 빌려다가 행사 장소로 달려야 했다.


청소년 단체 활동은 매월 계획표가 있어서 월마다 한 가지씩 큰 활동을 실시하여 결과를 연맹에 보고해야 했다. 연맹에 보고를 해야만 지도 실적이 기록되고, 기념품을 보내주기도 했다. 단체로 현장학습을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보험에 가입하고, 버스를 대절해야 했고, 개별로 참가 여부를 조사하여 참가비도 걷어서 확인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 해에 신종플루가 유행하여 현장학습이 많이 취소되었다는 것.


사이버 가정학습은 학생들이 가정에서 스스로 학습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온라인상의 수업 도구 같은 것이었다. 당시에 모든 학급에서 담임교사가 사이버 학급을 개설하도록 하였다. 사이버 가정학습에 가입하지 못하는 학생이나 학부모가 있으면 담임교사들이 나에게로 연락하여 그들을 대신 가입시켜 줘야 했다. 교감 선생님께서 사이버 가정학습을 학급별로 어느 정도 참여하는지, 참여율을 도표로 만들어 보기 쉽게 정리하여 매달 말일에 그 달의 학습 현황을 보고하라 했다. 보고서에는 모든 학급의 도표가 들어가야 했는데, 실제로 모든 선생님께 도표를 만들어서 보내달라고 하는 것보다 내가 대신 로그인 하여 현황을 프린트스크린하는 것이 편했기에 전 학급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받아 두고, 직접 접속하여 내용을 확했다. 약간의 편법이었지만 모든 선생님들이 그것을 편하게 여겼기에 그렇게 했다. 매달 올리는 보고서의 양은 20쪽이 넘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고 교감 선생님께서 창의적으로 만들어 낸 일이었다.


사용하던 홈페이지의 기한이 만료되어 새로운 홈페이지를 제작해야 했다. 학교 홈페이지 관리자인 나는 컴퓨터를 그리 잘하는 편도 아니었고, 홈페이지는 생소하여 정보부장님이 방법을 모두 알려주시긴 했지만, 세세하게 홈페이지의 체계를 정리하는 것은 나의 담당이었다. 주변에서는 내가 정보부 소속이라며 컴퓨터가 고장 날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하여 물어보기 일쑤였다. 나는 잘 몰라도 성의껏 문제를 해결해 줬다. 어떤 반에서는 컴퓨터가 안 되어 가 보니 전원코드가 헐거워 빠져 있었다. 나는 컴퓨터 책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전원 코드를 연결해 주고 돌아왔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면 어떤 선생님은

 

"그런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정보부를 해?"


라고 했다.


그 외에도 업무가 더 있었으나 15년 전의 일이므로 세세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든 업무가 매월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어서 한가한 때가 없었다. 그저 모든 업무가 밀리지 않고 처리되도록 하는 방법은 매일 퇴근시간 전까지 컴퓨터 앞에서 한 시도 게으름 피우지 않는 것이었다. 루종일 화장실 한 번 못 가고 퇴근하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6학년 담임이기도 했다. 졸업 앨범도 만들어야 하고, 수학여행도 가야 했다. 진로 상담도 해야 했고, 학업 성취도 평가를 위한 보충수업도 했다. 한시적으로 0교시와 7교시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한 학기 정도 미친 듯이 일을 하다 보니 이것을 연말까지 계속하다간 병이 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룸메이트는 나와 경력이 같은데 항상 나보다 먼저 퇴근하여 관사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결국엔 참지 못하고 교감선생님께 찾아가 정중히 부탁을 드렸다.


“제 업무가 어려운 업무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너무 과중한 것 같습니다. 매일같이 다른 공문 결재를 받으러 3명의 부장 선생님을 찾아다녀야 해서 더욱 힘듭니다.(이때만 해도 결재를 직접 수기로 서명을 받아야 했다.) 업무를 줄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감 선생님은 못마땅해하면서도 할 말은 없으신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매일 나와 결재서류를 맞이하다 보니 조금은 느끼는 바가 있었으리라.


“이미 정해진 것인데 너무 많이 빼 줄 수는 없고, 이 중 2가지만 빼 줄 테니 얘기해 보세요.”


20개 중에 겨우 두 가지라니. 무엇을 빼달라고 했었는지는 정확하게 생각은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업무를 새롭게 받은 사람은 나보다 6개월 늦게 발령받은 선생님들이었는데, 그 업무를 넘기고 나서 평소보다 조금 이른 퇴근을 하며, 퇴근길에 학교를 올려다보니 그 두 반에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새로 업무를 받았는데 일이 갑자기 너무 많아서 매일 야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혼자서 하던 일인데 그중 겨우 한 가지씩 가져갔을 뿐인데 야근이라니.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온 것인가.


일은 잘하면 잘할수록 더욱 늘어나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규 티'는 좀 천천히 벗을 걸 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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