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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ihnK Feb 27. 2024

나는 초등교사를 그만두었다

15. 학부모 상담이라는 비극-3

초등교사 4년 차에 6학년 담임을 할 때의 일이다. 학급에 한부모 가정이 꽤 많았다. 그중 아버지 혼자 두 딸을 양육하는 학부모님이 계셨다. 우리 반 학생이 동생이고, 위에 중학생 언니가 있었다. 둘 다 아주 격동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제가요~ 힘들어 죽~~겠습니다."


저녁 8시 30분쯤 취한 목소리의 학부모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한부모 가정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딸들이다 보니 소통도 안 되고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이다.


'제 말도 안 듣습니다.'


그래도 첫 통화에서는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그냥 말씀하시는 내용에 "네. 네. 맞습니다."만 말하다 보니 30분이 훌쩍 흘렀다. 내심 끊고 싶었지만 하실 말씀이 많으신 듯했다.


"...한부모 가정이 고충이 많습니다."


"네, 네. 당연히 그러시겠죠."


동네에서 한부모 가정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모임이 있다고 했다. 모임에서 고민을 나누다 보면 집집마다 고민들이 비슷하다고 했다. 주로 아이들이 사춘기 때 비행을 일삼는 것. 하지만 그것은 비단 한부모 가정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곧 끝날 줄 알았던 전화는 1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끊어졌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한 번쯤 이야기를 들어드리면 속이라도 시원하시겠지.


전화는 한 달 정도 후에 또 걸려왔다. 이번에도 약주를 잔뜩 하신 목소리였다.


"제가 속이 상해서 술 좀 먹었습니다."


그 학생은 정말 유별날 정도로 사고뭉치였다. 몇 가지 생각나는 사건들을 나열해 보자면 시내에 실내 디스코팡팡을 탈 수 있는 곳이 있다는데 그곳에서 담배를 배웠다고 했다. 늘 긴 머리를 파마를 하고 다녔는데 파마할 돈이 없자 아래 학년 아이들에게 돈을 모아 오라고 시켰다. 아래 학년 아이들이 모은 돈이 부족하니 그 아래 학년 아이들에게 또 모아 오라고 시켰다. 그 아이들 부모가 그 사실을 알고 학교에 신고하였고, 그로 인해 다시는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기로 약속도 하고, 신고자가 누구인지 찾아내지 말고, 보복하지도 말라고 당부했는데 다음 날 곧바로 그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가 누가 일렀냐며 화를 내며 신고 학생을 찾아다녔다. 전담 수업 시간에는 수업을 전혀 듣지 않고 아예 뒤돌아 앉아있거나 화장실을 간다며 교실을 나와 들어가지 않았다. 수업 도중 벌떡 일어나거나, 휴대전화로 통화를 큰 소리로 하기도 했다.


그 학생과는 상담을 너무 매일 같이 해서 입이 아플 정도였다. 학부모가 전화를 장시간 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힘들었지만 그저 '네, 네.' 대답만 해드려도 되었기에 보통 때에는 괜찮았다. 그렇지만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었어도, 학교 회식자리였어도 전화는 걸려왔고, 현재 상황을 설명드려도 '방해해서 죄송하지만...'이라고 하시며 통화는 이어졌다.


매번 30분 이상의 통화를 해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시간은 항상 늦은 저녁 즈음 해서. 몇 번의 통화 후에는 그분이 왜 이혼했는지, 전에 살던 애인과는 이제는 같이 안 살고, 새로운 다른 애인을 만나고 있으며, 아이들이 그 사람들과 사이가 어떤지 등등 가정사를 세세히 알게 되었다. 아이 교육과는 무관한 굉장히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는 나중에 딴소리하시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저녁 시간에 전화가 울리면 그 학부모님인가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때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초등 담임의 임기는 1년이면 끝난다는 것이다. 1년 동안 꽤 많은 전화통화가 이어졌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졸업한 후에 그런 연락을 받을 일은 없었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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