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바다에서
내가 진주에 정착하여 산 지 내년이면 삼십 년이 됩니다. 진주가 고향도 아니고 특별한 연고도 없이 친구의 권유로 들어와서 개업의로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풍족한 형편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봉직의로 생활했습니다. 공휴일이 되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나는 지리산보다는 바다를 찾았습니다. 부산에서 커서 바다에 더 익숙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팔십 년대에는 창선에 다리가 없어서 진교를 해서 남해대교를 지나 남해읍을 뒤로 하고 미조에 닿곤 했습니다. 바다에서 자랐다고는 했지만 회라고 해봤자 겨우 아나고회 정도였고 회식에 가서 회를 먹는다고 해도 이게 광어회다라고 하니 광어회인가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남해대교 아래에 있는 ‘다도 횟집’에 우연히 들어가서 감성돔을 시켜서 먹었는데 ‘세상에 이런 회의 맛’도 있나 싶었습니다. 입속에서 달큰하면서도 고기질이 졸깃하면서도 싱싱함이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때 젊어서 소주에 데인 적이 있어서 주로 매실주를 마셨습니다. 여기서 정말 잊을 수 없는 음식을 만났습니다. 감성돔 회가 끝나갈 때쯤이면 주인이 깻잎에 다대기를 얹어서 내어 왔습니다. 깻잎 채 입에 넣으면 새콤달콤하고 매운 맛이 싹 도는 것이 입에서 침이 저절로 고였습니다. 이 맛을 못잊어 한 때는 토요일마다 그곳을 찾은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은 주인에게 그 ‘레시피’를 배워서 지금도 가끔 집에서 만들어 맛을 음미하고 있습니다. 감성동의 뱃살과 거기에 붙은 뼈를 잘게 다지고, 풋고추, 양파, 마늘, 고춧가루로 새콤달콤하게 양념을 합니다. 감성돔의 껍질을 베끼고 살짝 데치고 잘라서 양념과 섞어서 깻잎 위에 놓습니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돕니다.
팔십팔 년에 개업을 하고 밤이고 낮이고 죽어라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때는 사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과의 특성상 그랬습니다. 십 년이 지나자 조금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서 이제는 남해를 가는데 삼천포 연육교를 지나 창선 다리를 지나 미조로 갔습니다. 왜 하필이면 미조냐고 하면 달리 이유는 없었습니다. 단지 거기가 남해 최남단이고 저 멀리 보이는 바다가 바로 태평양과 이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마음은 넓어졌습니다. 그리움의 끝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수평선이 그 무한한 공간을 한계 짓지만 나의 상상은 그 수평선 너머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저 그런 공간 속에서 몸을 흐느적거리다 오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미조에서는 ‘장보고 횟집’에 들러 먹은 감성돔도 감성돔이지만 성게 비빕밥의 쌉쌀한 맛을 빼놓을 수는 없었고 돌아갈 때는 남해 멸치를 사가지고 가서 먹기도 하고 선물도 했습니다.
창선 다리에 팔을 얹고 바다를 주황색으로 물들이는 낙조를 바라보면 나도 그 주황색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바다를 가르고 지나가는 배들의 흰 물살은 우리 삶의 진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나갈 때 물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친지로부터 ‘우리 식당’을 한번 가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니 웬걸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입니다. 나는 웬만하면 아무리 맛있어도 줄까지 서면서까지 기다리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뻘쭘하지만 줄을 기다려 들어가니 사람들이 시장바닥 같이 빼곡이 앉아서 열심히 먹고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에게도 주문한 갈치구이가 나왔습니다. 껍질만 노릇하게 구워져 있었는데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갈치 냄새가 코에 닿는데 이건 이제껏 집에서 먹던 갈치맛이 아니었습니다. 갈치살을 입에 넣으니 부드럽고도 푸근하게 입속에서 퍼졌습니다. 그 후로 서울에서 친척들이 오면 꼭 이리로 데리고 와서 갈치구이 맛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는데 그들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했습니다.
창선을 지나 미조로 가는 도중에 물건리 근처에서 ‘몽돌횟집‘이란 횟집 이름이 보였습니다. 이름이 친근하고 재미있어 무조건 찾아서 내려갔습니다. 식당 앞에는 방파제를 하고 있는 커다란 닻 모양의 시멘트 구조물이 있었습니다. 횟집에 앉아서 창문을 통해 회가 나올 때까지 그저 남해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자체가 나에게는 안식이었습니다. 감성돔이 나왔습니다. 내가 아는 체를 하면서 예전에는 남해 대교에서 감성돔을 먹었다고 하니까 주인이 대뜸 “거기 하고 여기는 물이 다릅니다. 고기 맛이 다르지요” 하며 정색하면서 말했습니다. 그의 말에 동의반 부인반 하면서 회를 입에 넣으니 주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역시 이때도 저는 매실주 한 병을 반주로 하고 집으로 갈 때는 아내가 운전을 했습니다. 나는 반쯤은 일부러 해롱대면서 세상이 주먹만하게 보이는 그 맛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상주해수욕장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해인가 서울에서 형제들과 제수씨와 아이들이 몽땅 내려와서 민박을 했습니다. 여름이라 밤새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둥둥 떠다니면서 자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누구도 피곤한 기색없이 해수욕장의 부드러운 모래 속에 자기들의 몸을 파묻고 여름 태양은 우리를 여지없이 햇살로 쏘아주었습니다. 모래는 밀가루처럼 차진 것도 아닌 것이 부드럽기가 여인의 품이라고 할까요. 해변은 C자 형으로 바다를 아늑히 품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 나에게도 손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들과 함께 여름이 한참 지난 팔월 중순에 두곡ㆍ월포의 펜션에서 여름 휴가를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붐비는 데는 안 가는 성질이라 늦여름에 가니 피서객은 거의 없었습니다. 몽돌이 가끔 보였고 두곡 쪽 해수욕장에 가서 손자들과 같이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놀았습니다. 밤에 아내와 같이 해변을 거니는데 파도 소리가 이상했습니다. 저 멀리서 파도소리가 들리는가 했는데 파도 소리에 발이라도 달렸는지 휘익 우리에게로 달려와서는 우리 뒤로 사라졌습니다. 그냥 낮에는 파도소리가 철썩철썩 들리던 것이 바람 속에 비바람이 몰아치듯이 파돗소리가 해변을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손자들과 아들 부부를 앞세우고 다랭이 마을로 올라가는데 롤러코스트를 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늘은 점점 가깝고 일망무제의 바다는 나의 턱까지 올라왔습니다. 다랭이 마을의 계단식 논을 하늘에서부터 딛고 파란 바다에 첨벙 빠져버리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 행복이 누구는 재물이 근거가 되기도 하고 누구는 마음의 평화에서 구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한 평생 살아보면 대부분은 힘이 듭니다. 작은 고난으로 올 수도 있고 감당 못할 재난으로 말미암아 허덕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과거는 이상하게도 행복했던 순간은 어느덧 다 사라지고 어려웠던 시간만이 화인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이 언제나 하늘에서 우박처럼 쏟아지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 큰 것만을 찾다가는 영원히 행복은 날아가 버린 파랑새 처지가 됩니다.
저 남해 바다에 옹기종기 혹은 여기저기 떠 있는 섬들이 보입니다. 우리의 소소한 행복들은 저 섬들은 아닐까요. 의식의 중간중간에 떠 있는 사소한 행복들이 우리가 발견해야 할 길일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고해 속에 떠 있는 섬들을 찾아서 나는 가끔 차를 몰아서 남해로 들어갔습니다. 내 인생의 찌든 때를 거기다 씻고 돌아와서 힘을 얻으며 삼십 년 가까이 살아왔습니다. 이번 봄은 설천 벚꽃 길의 낙화와 도다리 쑥국의 향을 찾아나서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