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쉬고 싶었다.
어린 나에게 이 세상은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정글이었다. 험난한 정글에서 벗어나 유일한 나의 안식처, 집으로 매일 돌아가는 일상이었다. 유일한 안식처였지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은 어딘가 위험하고 나의 어린 에너지를 앗아가지만 그럼에도 욕을 들을 일은 없었다. 당시 아이들은 '미워, 나빠!'와 같은 강도 낮은 말들을 사용했고, 짓궂은 남자아이 몇몇의 그마저도 본인의 허풍을 떨기 위한 것을 제외한다면 지나가는 사람이 갑자기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듯이 어린아이가 쌍욕을 들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매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부모님의 언어였다.
부모님이 서로를 향해 내뱉는 말이었다. 나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이유로 나의 귀로 제멋대로 들어와 심장을 불규칙하게 울려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순간 존재하지 않는 듯이 숨을 죽였다. 굳어지는 근육과 극히 작아지는 호흡과는 반대로 심장만이 가슴에서 퉁퉁거리며 거세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로지 가슴에서 느껴지는 진동만이 내가 존재하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숨을 죽이며 죽어가지만 강한 심장 압박으로 사람을 살려내는 생사의 긴박한 현장이었다.
생과 사의 기로 속에서 진짜로 오롯이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은 게임이었다.
게임. 따뜻한 인사말과 재미있는 농담, 친절한 대화들이 오가는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신세계. 그곳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큼은 나도 안락할 수 있었다.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건 내가 죽지 않는 이유이자 지금 이 삶을 살아도 되는 이유였다.
게임에서의 나는 열심히 노동하고 돈을 벌고 사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지고 진심으로 웃어댔다. 그곳에서의 삶이 진짜 나의 삶이었다. 게임을 하려면 현실의 내가 살아있어야 했다. 매일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심장의 압박에 창밖을 보게 되는 강한 충동에도 창문을 열지 않는 이유였다. '불안함에 떠는 나'와 '즐겁게 웃는 나'는 그렇게 공존했다.
밥 먹는 시간과 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다수의 시간을 쏟아부었음에도, 그렇게 살았으면서도 게임을 완전히 그만두게 되었다.
게임을 그만두게 된 건 특별한 계기도, 부질없다는 깨달음을 얻어서도 아닌 그저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더 이상 내 삶을 게임에 의탁할 필요가 없었다. 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야 했던 고등학교 생활은 집을 잠만 잘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나는 늦은 시간 귀가하며 피곤함에 눈과 귀가 닫히는 일이 많았다. 게임의 삶을 살게 해주었던 부모의 존재감이 미미해졌다.
참 오랜 시간을 현실에서 살지 않았다. 현실에서 살 수 없게 하는 존재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