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자신은 이탈리아 사람이고 75살이며, 아내는 10년 전에 죽어서 지금 혼자 살고 있는데 혼자 산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고 만약 내가 자신의 집을 방문해 준다면 이탈리아 에스프레소를 대접하고 싶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캐나다에 살면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던 경우는 손에 꼽는다. 자주 갔던 마트의 캐셔가 내가 입고 있던 한국에서 산 후드 달린 롱코트가 맘에 든다면서 어디서 샀는지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고 또 한 번은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외출을 했다가 옷 색깔이 멋지다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하는 통에 당황한 적이 있었다. 마치 종을 치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브의 강아지인양, 빨간색에 대한 무의식적인 즉각 반응을 경험한 후 두 번다시 그 옷을 입지 않았다. 그렇게 옷과 관련된 멘트 말고 한국에서도 없던 일을 외국에서 경험하다니, 그것도 거지마저도 잘생겼다고 명성 자자한 이탈리아 남자로부터...
‘내가 인생의 전성기를 여기에서 맞나?’
며칠 후, 그 할아버지를 또 마주쳤다.
“are you chinese?"로 시작하는 것을 보니 나를 전혀 기억 못 하는 듯했다. 동양인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으니 한 번 본 것으로 알아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도 계속 똑같은 패턴으로 말을 걸어왔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하루종일 밖에 나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여자만 보면 튀어나가 무조건 말을 걸고 있었다. 백인 흑인 황인 안 가리고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도, 때론 염치도 없이 20대 정도로 보이는 멋진 아가씨에게까지도 말을 걸었다. 인종도 국적도 나이도 개의치 않는 진정한 무차별 박애주의자, 그가 차별한 유일한 것은 성별뿐이었다. 그렇다고 차별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나한테 말을 걸던 중에 갑자기 지나가는 다른 여자를 향해 뛰어간 적도 있었으니.
하루는 또 다른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로 가는 도중에 이탈리아 할아버지한테 잠시 붙들려서 “are you chinese?"로 시작하는 고정된 대화를 마치고 다시 학교를 향해 걸어가던 중이었다. 새로 나타난 할아버지도 "나는 이탈리아 사람이며 저 사람(첫 번째 이탈리아 할아버지)과는 친구”라고 했다. 그다음 말은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뭔가 횡설수설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러고나서 보니 두 번째 할아버지 역시 하루 종일 동네를 배회하면서 지나는 여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캐나다를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에 첫 번째 이탈리아 할아버지를 마주쳤다. 나는 이사 절차 때문에 관리실을 다녀오는 길이었고 할아버지는 방금 백인 여성을 쫓아갔다가 퇴자를 맞은 직후였다. 그즈음에 할아버지는 한 쪽 귀에 커다랗게 헝겊을 대고 그것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머리 전체를 붕대로 칭칭 두르고서 큰 밀짚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허수아비 같았다.
변함없이 “are you chinese?”
Korean이라고 그렇게 수없이 이야기를 해줬건만 나는 끝내 만리장성의 벽을 넘지 못했다.
캐나다에서 두 명의 이탈리아 남자가 말을 걸어왔으니 여한은 없다.
그렇지만 고작 두 명을 표본으로, 그것도 단기기억상실증 혹은 노인성 질환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할아버지를 분석하며 이탈리아 남자 모두를 바람둥이라고 일반화시키려 하는 데는 나의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을지도 모르겠다. 악조건 속에서도 연애 의지만큼은 저하시키지 못하는 초강력 DNA가 그들에게 있어야 나 역시 무용담이라도 되는 듯 허세 아닌 허세를 부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