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있어요! #22] 잡다한 비행 이야기 일문다답
질문 #22: 승무원들은 시차 적응을 더 잘하나요? 요령을 가르쳐주세요!
"아니! 전~혀. 시계 맞추듯이 시차를 맞출 수 있는 줄 알아? 한 달에 몇 번씩 장거리 비행을 다니는데, 로봇도 아니고 어떻게 매 번 시차에 적응하겠냐!"
아무 잘못 없는 순진한 질문에 갑자기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이 분노는 무엇인가?
"뭐야? 승무원이 아무래도 시차 적응하는 요령이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건데 왜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고 그래?"
일단 사과한다. 내가 흥분했다.
나는 25년 동안 주로 장거리 비행만 했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서로 다른 시차 속을 오가며 살다 보면,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과장이 좀 심한가? 그럼 지금부터 엄살 이야기 큐.
내 몸이 머물고 있는 시간을 떠나 새로운 시간에 도착하면 일단 몸이 깜짝 놀란다. 피곤해서 자리에 눕지만, 두세 시간 정도 자다가 일어나면 지금이 새벽인지 저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당황한 온몸의 신경들이 나의 행동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세포의 일부는 아직도 수면 중인 듯, 반응이 영 시원찮다. 밖에 나가 밥도 먹고 구경도 하려다 보니 어색한 몸뚱이를 질질 끌고 거리를 다닌다. 어떻게든 시차에 적응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좀 어중간하게 적응되었나 싶으면 또다시 다른 시간으로 이동해버린다. 성수기에 바쁜 비행 스케줄로 홈베이스에서조차 휴식이 부족하면 결국 내 몸은 시간을 잃어버린다. 정신은 멍하고 몸이 붕 뜬 느낌으로 일 년 내내 나쁜 컨디션을 유지하게 된다. 승무원의 업보이자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고통이다. 그렇다 보니 천진난만한 질문에 나도 그만 예민해져 버렸다.
너는 지금 어느 시간에 있니?
외국인 용병 기장들과는 종종 이런 대화를 한다.
"너는 지금 어느 시간에 있니?"
"나야 베이징 시간에 있지."
"나는 유럽하고 베이징하고 중간쯤인 것 같아. 인도 정도? 그러니 캡틴 신이 먼저 근무하고 내가 나중에 교대했으면 해. 괜찮아?"
용병들은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자신의 몸이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신체 리듬의 기준점을 놓쳐버리면 더 힘들다. 그냥 졸리면 자고 안 졸리면 일어나 있는, 리듬 없는 생활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매일 운동을 하며 내 신체와 친해지면 리듬을 찾는데 유리하다. 내 몸이 주는 시그널을 귀담아들을 수 있게 되어 작은 이상도 감지할 수 있고, 운동을 하면서 몸에게 경각심을 주어 깨어있을 때와 잠들 때의 구분을 좀 더 명확하게 해 준다.
해가 뜨는 쪽으로 여행하면 더 힘들다고?
물론 시차 적응을 더 잘하는 사람도 있다. 체력과도 관련이 있고 숙면을 취하는 정도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1시간 시차가 적응되는데 하루가 걸린다고 한다. 일리가 있는 말 같다. 단, 내 생각에 하루당 1시간은 동쪽으로 이동했을 경우인 것 같다. 미국 LA는 우리 시간보다 7~8시간 빠른데(날짜변경선은 무시하자), 실제로 6~7일이 지나면 밤새 숙면을 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론 낮에 활동을 하면서 시차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을 경우이다. 반대로 서쪽으로 이동했을 경우는, 예를 들어 파리에 갔을 경우 그 절반인 3~4일 만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다. 같은 서쪽으로 이동하더라도, 만약 LA에서 서울로 돌아오면 내 집, 내 침대에서 적응을 하다 보니 그 시간은 더 짧아진다. 나는 2~3일 만에 적응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하루, 이틀 정도 체류하는 여정이면 제시간에 잠을 못 자서 피곤할 뿐 신체 리듬이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장거리 비행을 하거나, 3일 이상 체류하는 다구간 비행을 하게 되면 조금씩 내 몸에 시간이 바뀌어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체 리듬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서 한국시간에 맞추어 먹고 잔다고 해도 햇빛, 기온 등 환경 때문에 신체가 느끼는 시간은 조금씩 바뀌어간다.
승무원 피로관리 규정에 따르면, 시차가 4시간보다 더 차이가 날 경우, 현지에서 72시간 이상을 체류해야 '현지화'되었다고 가정한다. '현지화'가 되지 못하면 피로관리 차원에서 근무시간제한을 더 타이트하게 적용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동쪽으로 시차가 4시간보다 더 큰 지역으로 여행을 하면 72시간도 충분하지는 않다.
몸이 헷갈리지 않게 해 줘
졸음운전이 매우 위험한데, 미국에서 현지 시차에 적응되지 않은 채 한국의 새벽 시간에 운전을 하는 것은 특히 위험하다. 햇볕이 쨍쨍해서 정신이 멀쩡한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깜빡 졸게 된다. "아우 졸려." 하면서 서서히 졸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면증 환자처럼 멀쩡하다 갑자기 잠이 쏟아질 수 있다. 몸이 헷갈려하는 것이다. 굳이 그 시간에 운전을 해야 한다면 가능한 혼자 운전하지 말고 조수석에 보초를 세워두어야 안전하다.
사실 신체의 시간이 자주 바뀔수록 건강에 해롭다. 시차(jet lag)가 생기지 않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길이고, 어쩔 수 없이 잦은 시차 변화 속에 살아야 한다면 가능한 적응하지 않고 신체 리듬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에 근무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생체적 혼란은 피할 수 없고, 대신 건강 관리에 그만큼 신경을 써야 한다. 세상에 모든 동물, 아니 식물조차도 24시간 주기의 생체리듬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24시간이 수시로 15시간이 되었다 30시간이 되었다 한다고 상상해보라. 며칠 밤새며 공부하거나 과로에 시달리는 것도 건강에 무척 해로운 일이지만 성격이 좀 다르다. 이 경우는 수면이 부족하고 활동량이 많아 매우 피곤한 상태가 된 것이지 시간적 환경이 바뀐 게 아니므로 몸이 헷갈려하지는 않는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승무원은 시차 적응을 더 잘할 수 있을까? 물론 남들보다 신체 컨디션을 잘 유지하는 요령은 있을 수 있다. 낮에 자지 않고 버티다가 밤에 수면 유도제를 먹고 숙면을 취한다거나, 바람과 햇볕을 많이 쐰다거나, 자기 전에 반신욕을 한다거나 등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승무원의 시차 적응법’이란 해외 체류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다음 비행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피로도를 조절하는 의미이지, 실제로 신체 리듬이 현지 시간에 적응되는 것은 아니다. 신체가 인지하는 시간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처럼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