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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바로 알기-9

스탈린이 히틀러의 침략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는 거짓말

by 김남기

(이 글은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목적하에 연재하게 된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공부한 것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짧게 정리하며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1956년 소련의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이른바 스탈린 격하운동(De-Stalinization)을 전개했다. 흐루쇼프가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에 대해 비난하며 전개한 논리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스탈린에 관한 것도 있다. 즉, 스탈린이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 흐루쇼프의 논리였다.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한 흐루쇼프는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스탈린이 국가의 전쟁 준비를 부실하게 했다고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스탈린은 전쟁의 비극이 소련에 대한 독일의 예상치 못한 공격의 결과로서 일어났다는 논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동지들, 이것은 완전히 거짓입니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자마자, 그(스탈린)는 공산주의를 청산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전쟁 이전 시기의 많은 상황들은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음을 입중해 줍니다. 우리의 산업이 적절하게 운용되고 군대에 필요한 물품이 제때 공급되었다면, 전시의 손실은 확실히 줄어들었을 겁니다. 우리 군대의 무장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의 과학과 기술은 전쟁 전에 탱크와 대포의 훌륭한 견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대량 생산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Stalin_portrait_1937.jpg 1937년에 나온 스탈린 초상화.

이와 같은 흐루쇼프의 주장은 놀랍게도 스탈린에 대해 비난하는 소위 트로츠키주의 진영에서도 자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소위 트로츠키의 사상을 지향하는 노동자 연대의 경우 지난 202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80주년 관련 글에서 스탈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왜곡한다.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적군의 규모를 걱정하는 장군들에게 “그 군대는 지휘관이 없다”고 안심시켰다. 스탈린의 혁명 동지 대량 숙청이 소련을 나치의 침공 타깃으로 만든 것이다. 그 다음,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소련군은 독일군이 침공할 때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그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직전인 1939년 8월에 (세계를 놀라게 하며) 체결됐다. 스탈린은 독일의 서유럽 침공을 용인함으로써 소련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제 딴에는 피하려 했다.(중략.....)스탈린은 어떻게든 히틀러의 군대를 도발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강박 때문에 스탈린은 집착적 오판을 거듭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도에 관한 소련 측 첩보원들과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관의 경고를 무시했다.”

611e788485600a4f5b4df1f8.jpg 소련의 공장.

해당 글만 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틀러의 침공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오히려 독일의 서유럽 침공을 용인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5장에서 이미 깊이 다룬 바와 같이, 독소 불가침 조약은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구축하자는 소련의 주장을 서방이 무시하게 된 결과였다. 무슨 스탈린이 히틀러와 동맹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흐루쇼프나 노동자 연대와 같은 트로츠키 사상을 지향하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스탈린은 반파시즘 전쟁에 대비했다. 스탈린은 1928년과 1941년 사이에 9,000개 이상의 공장을 건설했다. 우랄산맥 넘어에 있는 동부 지역을 강력한 산업 단지로 조성하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주코프는 “공산당 노선의 지혜와 통찰력”에 찬사를 담은 글을 회고록에 썼다. 1930년 연평균 탱크 생산 대수는 740대였는데, 1938년에는 2,271대로 늘어났다. 소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비난하는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소련의 붉은 군대는 양적 성장을 거두었고, 이후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질적성장도 이루어졌다.


ww2-T-34-Production.jpg 소련의 탱크 공장.

1932년 소련은 사상 최초로 2개의 기계화 군단을 편성했는데, 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최초의 기갑 사단을 창설하기 3년 전에 달성한 성과였다. 같은 기간 동안 연평균 항공기 건조 수는 860대에서 5,500대로 증가했다. 제3차 5개년 계획 기간인, 1938년과 1940년 사이에 공업 생산력은 매년 13% 증가했으며, 방위 산업의 성장률은 39%였다. 독-소 불가침 조약에 의해 제공된 숨 돌릴 틈은 스탈린에 의해 방위 산업의 생산을 최대로 밀어붙이는 데 사용되었다.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에 따르면 소련군 총참모부는 스페인이 파시스트들에게 함락당한 이후 나치와 제국주의 블록의 침략이 소련에 파멸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하고 우려했다. 그렇기에 스탈린과 소련은 나치가 공격하기 이전에 군사력을 건설할 시간을 벌고자 했고, 실제로 1939년 9월 소련은 항공기 생산 공장 9곳과 항공기 엔진 공장 7곳을 열었으며 1938년 150만의 군대를 보유했던 소련의 붉은 군대는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이 침공하던 1941년 6월에는 500만의 군대를 보유한 군대로 거듭났다.


1939년 1월 1일과 1941년 6월 22일 동안에 일어난 군수산업의 생산량은 인상적이다. 2만 9,637문의 대포와 5만 2,407문의 박격포를 포함하여 포는 9만 2,578문이었다. 82mm와 120mm의 새로운 박격포가 전쟁 직전에 생산됐고, 소련 공군은 1만 7,745대의 전투기를 보유했으며, 이 중 3,719대는 신형 전투기였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7,000대 이상의 탱크를 제공받았다. 1940년에 독일의 주력전차보다 우수한 중형의 T-34와 보로실로프 전차(KV 중 전차) 생산이 시작됐다. 전쟁이 발발했던 1941년 6월 기준 1,851대의 신형 전차가 생산된 상태였다. 적잖은 전투기와 전차가 이 기간에 생산됐다.

1_xGJqqxIjfadZEK-Wy4aFlg.jpg T-34 전차: 제2차 세게대전 당시 소련군의 주력 전차다.

여기서 언급된 T-34 전차에 대해 언급하자면, 해당 전차는 1943년 독일군이 티거 전차를 투입하기 전까지 독일의 주력전차보다 좋은 성능을 보유했었다. 1941년 독소전 개전 초기 독일군의 주력 전차는 3호 전차나 4호 전차였는데, 이 전차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소련이 개발한 T-34 전차에게 상대가 되질 않았다. 따라서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을 군사적으로 제대로 대비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황당무계한 주장이다. 물론 1930년대 있던 대숙청의 여파로 일부 유능한 인사들이 숙청되기도 했다. 따라서 게오르기 주코프는 몇몇 이들에게 프랑스를 상대하는 독일의 전법에서 교훈을 익히도록 했다. 1940년 12월 23일부터 1941년 1월13일까지, 모든 고위 장교들이 대규모 회의에 참석했는데, 여기서 토론의 중심은 독일과의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파시스트가 대규모 전차 부대를 운용하며 축적한 경험에 대해 주의 깊게 검토했으며, 회의 이틀 후 대규모 군사 작전과 전략 연습이 지도상에서 벌어졌고, 스탈린도 이에 참여했다. 주코프의 얘기를 들어보자.


“전략적 상황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서부 전선에서의 전개 양상을 기초로 했다.”


서쪽의 국경선을 따라 새로운 요새 건설이 1940년에 시작되었으며,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2,500개의 시멘트 군사 시설이 건설되었다. 매일 14만 명이 이 시설의 건설에 매달렸다. 주코프에 따르면 이 작업을 지도부에게 재촉한 인물은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1941년 3월 초, 티모셴코(Timoshenko)와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예비군 보병대를 소집할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독일에게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주지 않기를 원하며 이 요구를 거절했다. 마침내 3월 말에 그는 80만 명의 예비군 소집을 받아들였고, 그들은 국경지방으로 보내졌다. 4월, 육군 참모 총장은 스탈린에게 발틱, 벨라루스, 키예프, 오데사(Odessa) 군사 지구 출신의 군대는 공격을 막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스탈린은 28개의 국경 사단을 4개 군으로 묶어 전진시키기로 하였고, 나치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534435873_24302910595994618_3185904154721226836_n.jpg 전쟁 당시 소련의 프로파간다: "하늘을 지키는 쓰딸린 동지의 매들에게 영광이 있기를! 파시스트 포식자들에게 위협을 안기라"고 써 있다.

1941년 5월 5일 스탈린은 크렘린궁에서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들에게 연설했다. 그 연설의 주요한 내용은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이상적인, 무적의 군대라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였다. 주코프는 이후 자신의 회고록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시키려는 목적으로 주장한 비밀 보고서는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주코프에 따르면 독-소 불가침 조약 이후인 1939년부터 1941년 중반까지 소련 인민들과 공산당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각별히 전력을 다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보았을 때, 스탈린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유는 파시즘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서 보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왜 스탈린은 예상되는 전쟁을 대비했음에도, 독일군의 기습 공격 시점 자체를 빗나갈 정도로 파악하지 못했을까? 예기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당시 히틀러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 1940년 프랑스 점령 이후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항공전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했다. 항공전에서 승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이 곧바로 침공하지 않을 거라는 게 스탈린의 판단이었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의 판단은 제법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빌헬름 2세가 겪은 양면전선은 결국 패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스탈린의 합리적인 판단을 초월한 파시스트였다. 그래서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이 마치 전쟁에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얘기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흐루쇼프의 주장은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철저한 외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전시에 스탈린이 어떤 역할을 했고, 또 소련의 붉은 군대는 히틀러의 침략을 어떻게 무찔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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