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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나눈 사랑 호르몬에 관한 짧은 대화

지혜로운 나의 어머니

몇 년 전이었다.

당직근무 후 집으로 복귀해서 쉬고 있다가, 호르몬에 관한 칼럼을 하나 읽었다.


https://health.chosun.com/healthyLife/column_view.jsp?idx=8696


강남세브란스병원 안철우 교수님의 칼럼이었는데, 내분비내과 교수님답게 호르몬에 대한 내용을 전문적이면서도 재밌게 잘 써주셨다.


내과와 소아과, 주로 보는 질환이 생각보다 서로 많이 다르지만,

내분비 세부 전공이라는 공통점이랄까. 내용에 휙 빨려들어갔다.


사랑 호르몬이라...


칼럼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노르에피네프린, 인슐린, 글루코코르티코이드, 미네랄 코르티코이드, 성장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 등등... 뿐만 아니라 위의 것들을 억제하거나 조절하는 호르몬까지도


이미 과학의 발전은 저러한 호르몬들을 인공적으로 생산해서 주입하고 몸을 치료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당뇨병, 파킨슨병, 쿠싱병, 에디슨 병, SIADH, 성장부진, 성조숙증, 폐경기 성호르몬 보충요법 등 수많은 질환에서 쓰이고 있고, 다른 종류의 약이나 치료들에 비하면 호르몬 대체요법은 안전성도 굉장히 높은 편이다."


사랑도 결국 호르몬 장난이라면,
그리고 저 호르몬들이 이미 인공적으로 생산 가능한 경지라면,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인공적으로 컨트롤 가능하다는 건데,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게 별거 아닌 거 아닐까?

hqdefault.jpg 사랑 호르몬이라. 허허.


당직 근무 후 피곤한 탓이었을까. 위 칼럼의 취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괜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며, 사랑의 무상함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해 냈다. 마침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어머니께서 내 볼맨 소리를 들으셨는지, 칼럼을 보여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물으셨다.


"너 병원에서 성장호르몬 치료하거나, 성조숙증 치료하는 아이들 많다고 했었지?"


"네. 아무래도 요즘은 키나 성장발달에 다들 관심이 많으시니까요."


"그게 나라에서 지정한 보험기준에 해당 안되면 비급여로도 주사 맞게 한다고 했지?"


"그렇죠. 부모님이랑 환아 모두 강력하게 원하면, 설명드리고 진행하죠. 효과는 확실한 편이에요."


"그렇게 보험 혜택 받지 않고 치료하면, 보통 얼마나 나오니?"


"음... 경우에 따라 모두 다르지만... 보통 3년 정도 주사하게 되는데... 성조숙증 치료는 비용이 그렇게 비싸진 않아요.

성장호르몬 치료가 문제인데... 건강 보험 적용이 안되면 XX만원 정도예요. 분명히 부담되는 가격이죠. 그래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되고, 막 강력하게 무조건적으로 권하지 않고요."


"그래. 그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호르몬 가격이 그 정도라는 거잖아?"


"그렇죠."


"그리고 너 같은 소아과 의사들이 그거 용량 계산해서 주입해 주고, 검사해서 확인하고, 계속 경과 살피면서 조정하는 것까지. 들어보니까 보통 복잡한 게 아니던데."


"네."


"그게 꼭 성장호르몬이나 성조숙증 호르몬 말고, 저 칼럼에 나온 사랑 호르몬이라는 것들도 비슷한 거지?"


"..."

"그렇게 비싸고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가능한 걸,
우리 몸은 그냥 공짜로 만들어내는 거잖아.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

그것 만으로 그 비싸고 대단한 호르몬이라는 걸 몸에서 자동으로 나오게 한다니,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니.

너 그걸 모른다니, 아직 한참 멀었구나."


그래, 아직 한참 멀었다.

어머니의 경험과 연륜과 지혜에 비하면, 서른 넘은 아들은 아직도 어린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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