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기만 하다면, 무엇을 해도 좋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몸이 약했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나는 그걸 잘 몰랐다. 아니,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학기 중에는 신기하게도 생리가 멈췄고, 방학이 되면 극심한 생리통이 찾아왔다. 밥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되어서 고기를 잘 먹지 않았고 매번 캐모마일을 마셨다. 나는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높은 편이라 스스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몸이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너는... 몸도 약하면서 정신력으로 모든 걸 다 이겨 내려 그래."
어머니가 매번 나를 보며 걱정하셨다.
그럼 나는 '진짜 괜찮은데?' 하며 넘겨버리곤 했다.
캐나다에 있으면서 그래도 혼자 잘 몸을 추스르겠다고 열심히 식단일지도 써보고 몸에 좋은 것도 챙겨보려고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걸 느꼈다. 처음엔 손이 저렸다. 충분히 자면 괜찮아졌다. 그러다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지속시간이 길어지더니 이제는 온몸이 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쉬고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내 몸은 점점 저림 증상이 심해졌고 4개월이 지났을 무렵 기숙사를 나가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온 순간 서있기가 힘들었다.
'큰일 났다.'
바로 캐런에게 연락을 했다.
- 캐런. 나 지금 숙소인데 몸이 많이 안 좋아. 걷기가 힘들어.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그렇게 캐런은 가족들과 나를 데리러 왔다.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타지에서 대체 무슨 검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나를 요리조리 관찰하던 의사는 결국 진통제를 처방할 수밖에 없었고 우선은 캐런의 집에서 푹 쉬어보기로 했다.
원래 4월 학기가 마치고 나면 2개월 동안 밴쿠버로 넘어가 캐나다의 일상을 즐겨볼 계획이었다. 밴쿠버도 가고, 퀘벡도 가서 오로라도 봐야지. 그런데 이 몸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결국 나는 4월 학기가 끝나고 바로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딸이 아픈 소식을 듣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어머니의 지시였다.
캐런은 나를 잘 돌보아 주었다. 틈틈이 저린 증상에 대해 찾아보고 영양제를 찾아주기도 하고 같이 기도도 해주며 내가 잘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렇게 며칠 그 집에서 쉬고 있으니 조금씩 다시 다리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저림 증상은 계속 있었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그렇게 나는.. 너무 아쉬웠지만, 캐런과 교회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겨우겨우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바로 한양대 병원에 입원을 했다. 별의별 검사를 다 했지만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증상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두통, 온몸의 저림, 그리고 이제는 심장 쪽이 저려서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검사하던 의사 선생님이 검사지를 계속 보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가끔씩.. 정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긴 합니다."
... 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은 안 괜찮았구나. 몸을 더 잘 돌볼걸. 밥도 더 잘 꼬박꼬박 챙겨 먹고, 내 마음을 좀 더 쉬게 해 줄걸. 계속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보며 계속 후회했다.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니는 모든 마음을 내려놓고 딱 하나의 마음만 갖게 되셨다.
"엄마. 나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
울면서 말했다.
"건강하기만 해 줘. 아프지만 말아줘."
아버지를 잃고, 딸까지 잃게 될까 두려웠던 어머니의 부탁이었다.
"엄마, 나 진짜 다시 잘 걷게 되면 몸 잘 챙길 거야. 밥도 잘 먹을 거야. 너무... 힘들게 공부하지 않을래."
"그래. 공부하지 마.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해. 건강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해도 돼."
그렇게 우리는 대학병원 병실에서 울며 대화했었다.
내가 한국에 오자마자 병원에 입원한 걸 알고 그가 병실에 찾아왔다. 꽃을 들고, 조용히 병실 문을 열었고 어머니는 곁을 비켜주셨다. 걱정과 안타까움이 묻어 나오는데 어쩔 줄 몰라하는 그를 보며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만나보아요.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연애.
퇴원해서 집에서 계속 몸을 추스르던 나를 그는 구리에서 대전까지 계속 찾아와 나를 부축하며 운동을 시켜주었다. 조금 걷다가 힘들어지면 앉고 그는 나의 저린 다리를 다시 풀어준 후 다시 걸었다. 처음엔 10분, 20분, 30분씩 시간을 조금씩 늘렸다. 그렇게 4개월 동안 나는 집에서 누워 어머니랑 대화하고 숨이 가빠지면 심호흡을 계속 했다가 그가 대전에 올 때면 밖에 나가 잠시 부축을 받으며 운동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몸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고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9학점 가벼운 과목들로 들으며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거의 9개월이 지날 무렵엔 심하게 저리던 증상은 거의 없어지고 자잘한 증상들만 남아 일상생활들이 다 가능해졌다.
건강이 우선이다. 그리고 밥을 챙겨 먹는 건 건강과 직결되어 있다. 그렇게 잘 먹지 않던 내가 이제는 어떻게든 잘 챙겨 먹으려고 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지자 나는 바로 기독교대안학교에 지원서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epilog.
그나마 다행인 건 그 뒤로 내 몸이 나한테 자잘한 저림 증상을 통해 임계점의 신호를 보낸다.
- 너 지금 무리하네? 너 여기서 좀 더 무리하면 나 다시 파업한다.
아, 미안미안. 이제 그만하고 좀 쉴게.
묘하게 안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