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좋았던 점 중에 하나는 인간관계에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이유로 좁게는 형제들과도 그리 자주 연락을 하지 못했다. 인도에 있으니 지인들의 경조사에 참석할 수 없었고 내가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다들 이해해 줬다. 파송 교회나 후원 교회들이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늘 손님이었으니 교회에서 관계 때문에 겪는 문제도 없었다. 그렇게 10년을 해외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오니 그동안 신경쓰지 않았던 인간관계가 다시금 중요해졌다. 그 때문인지 사람을 만나는 피로감이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로부터 오는 피로감이 밀려온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인간 관계도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쇠퇴하다가 사라진다. 이것은 가장 가까운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당연히 냉랭해지다가 마침내는 끊기고 만다. 천륜이라고 하는 부모 자식 관계는 좀처럼 끊기지는 않지만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일을 쉬지 않기 때문이지 거저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20년을 넘게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몇 가지 일로 관계가 정리되면서 나도 적잖게 내상을 입은 것 같다. 돌아보면 내게도 문제점들이 있었다. 상대방에게 무례한 면도 있었던 것 같고 나름대로는 돕는다고 시작한 일인데 오히려 서운함 때문에 관계가 끊기기도 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격도 관계를 파괴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내가 관계 때문에 왜 이렇게 힘들어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 발짝 물러나서 보니 알게 된 사실일 수도 있고 관계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지만 나는 문득 인간관계에도 유효기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으니 효과는 있다. 분명히 이러한 정의가 관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작년에 영어회화모임에 초대받아 만나게 된 사람들은 그 모임에서 두세 번 본 것이 다다. 연락처도 모르고 만나는데 그중에 한 분을 내가 진행하는 영어회화모임에 초대했더니 처음에도 흔쾌히 좋다고 했다가 이후로 부담스러워해서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26개월 내내 같이 군생활을 한 동기는 제대 후에 아예 연락이 끊겼다. 반면에 군생활에서 전도했던 선임과는 제대 후에도 3-4년은 연락을 하고 지냈던 것 같다. 대학 때 절친으로 지냈던 과동기하고는 각각 군생활을 하면서 무슨 연애편지라도 쓰듯이 서로에게 매주 편지를 쓰곤 했다. 그런데 둘 다 선임이 되어 군생활이 편해지니 편지가 뜸해졌다. 이 친구와는 대학 졸업 후에 10년 가까이는 연락했는데 이제는 연락이 끊겼다. 대학교 때 CCC라는 선교단체에서 만난 선후배들 몇몇과는 지난 20년 이상을 계속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보면 나 때문이든 상대방 때문이든 혹은 환경 때문이든 각각의 관계들이 어느 정도의 유효기간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관계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은 다만 지속적으로 만나는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계가 유효성(validity)은 지속성만이 아니라 신뢰성이나 친밀성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친구와는 서로 안부 정도 주고받지만 어떤 친구와는 서로의 어려움까지 나누고 실제적으로 서로의 짐을 나눠지기도 한다. 인도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거의 30년 만에 몇몇 친구들을 만났다. 너무 반갑고 순간적으로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추억을 떠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일이 년에 한 번 정도만 봐도 될 것 같았다. 같은 중고등학교를 다닌 의사 친구는 가족들이나 지인들이 관련된 질병이라도 생겨야 연락한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밥 한 끼라도 같이 하려고 했는데 통 만날 수가 없다. 각자 지난 30년 동안 살아온 삶이 있으니 반갑게 만나고 근황까지는 나누지만 뭔가를 함께 계속할 수는 없다.
이렇게 관계의 유효기간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새로운 관계에 대한 두려움도 줄었다. 오히려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끊긴 여러 관계의 유효기간이 좀 더 길었을 것 같다.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도 덜 주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