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블로크展 : 작은 선의 위대한 여행
세르주 블로크가 그린 삶과 사랑,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2년 전, 재치 있는 아이디어로 사랑과 관계를 탐구하던 그의 '키스' 전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광고와 출판, 순수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보여준 위트에 감탄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작가, 세르주 블로크가 '작은 선의 위대한 여행'이라는 새로운 이야기와 함께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는 사랑을 넘어 삶이라는 더 큰 바다를 항해하며, 한층 깊어진 사유의 울림을 선사한다.
“뉴욕 타임즈, 에르메스가 사랑하는 프랑스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 세르주 블로크(Serge Bloch, b.1956, France)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로, 그의 작업은 국경과 장르를 넘나들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타임지』, 『뉴욕 타임스』, 『르 몽드』 등 세계적인 매체에 삽화를 실으며 입지를 다졌고 , 삼성전자, 에르메스, 코카콜라 등 글로벌 브랜드는 물론 런던 지하철, 프랑스 환경부 같은 공공기관과의 협업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세상을 뒤흔든 31인의 바보들』로 이탈리아 볼로냐 라가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하는 등 , 작품성까지 인정받으며 최근에는 순수미술 영역까지 작업을 넓히는 '멈추지 않는 창작자'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세르주 블로크의 ‘선’은 한층 더 자유롭게 유영한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선은 때로는 인물 그 자체가 되고, 때로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의 실이 되며,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을 상징하는 길이 된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삶의 가장 복잡하고 깊은 층위를 꿰뚫어 보는 힘, 그것이 바로 그의 예술이 가진 본질이다.
이러한 힘은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세트장으로 꾸민 디테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벽과 의자를 이어 그린 그림은 빈 의자에 앉아있을 누군가를 상상하게 하고, 벽 사이에 난 좁은 통로와 '위험!' 표시는 관객을 이야기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이는 작가의 창작 철학과 맞닿아 있다. 세르주 블로크에게 “창의성의 원천은 자유”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전시장 곳곳의 재치 있는 설치물들은 바로 그 “자유로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이번 전시의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극장처럼 꾸며진 애니메이션 상영 공간이다. 어둠 속에 앉아 그의 이야기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찬찬히 바라보는 시간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향유'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특히 다비드 칼리와 협업한 애니메이션 '적(L'ennemi)'은 전쟁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폭로한다. 진짜 적이 맞은편 참호에 숨은 병사가 아니라 이 비극을 일으킨 권력자들임을 이야기하며, 그들이 어떻게 적을 무시무시한 괴물로 세뇌시키는지, 그 안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고통받는지를 보여주며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다. 놀라운 점은 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작가는 특유의 단순한 선 그림을 통해 전혀 무섭지 않고, 오히려 쉽고 재치있게 풀어낸다는 것이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어느 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는 한 사람의 인생과 재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작은 선은 한 아이의 '그림에 대한 재능'이 된다. 아이는 그 선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함께 어른으로 성장하며, 노년이 되기까지 삶이라는 멋진 여행을 함께한다. 그러다 노년의 끝에서 그 재능의 선을 길에 떨어뜨리는데, 마침 한 아이가 그것을 발견해 집어 들며 새로운 재능의 여행이 다시 시작된다. 재능과 인생이 돌고 도는 이 순환의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 '나는 기다립니다(I Wait...)' 역시 '순환하는 삶'이라는 주제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소년 시절의 추억에서 시작된 붉은 실은 한 남자의 일생을 따라간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전쟁터에 가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아내를 떠나보내는 모든 순간이 붉은 실 하나로 연결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녀들이 새로운 가정을 꾸릴 때, 그 실을 넘겨주며 생명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이처럼 작가는 단순한 선 하나로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이야말로 세르주 블로크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가장 단순한 선으로 우리 인간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깊은 철학과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힘, 그것이 그의 작품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다.
세르주 블로크는 자신만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박스피넛, 민경숙, 민은희, 미튼 등 국내 작가와의 협업 작품들도 선보인다. 그의 아이콘 '미스터 칩스'가 한국 작가들의 시각 언어를 통해 재탄생하는 모습은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또한 전시장 맞은편 1101 비스트로에서는 식음 공간과 어우러진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 예술이 우리의 일상과 얼마나 가까이 호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르주 블로크는 멈추지 않는 창작자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복잡하고 때로는 버거운 인생도 결국은 사랑과 관계, 소소한 용기들로 채워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선이 그려내는 위대한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인류의 삶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따뜻한 희망을 품게 된다. 이번 전시는 8월 17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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