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휴가를 불과 며칠 앞두고 저와 셋째가 3일 내내 고열이 났습니다. 엄마와 딸이 동시에 39도 넘는 열을 앓으며 여행의 설렘은커녕 과연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온 가족이 고민하였습니다.
그런데 출국을 이틀 앞두고 저와 아이의 고열이 떨어져서 우리는 무사히 칼리보 공항을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칼리보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필리핀에 상륙한 태풍이 문제입니다. 보라카이 화이트비치는 태풍의 위력으로 고개를 위로 올려서 봐야 할 만큼 높은 파도가 치고, 그 고운 흰모래는 온갖 부유물로 엉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여행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무척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보라카이 날씨는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했고 우리는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그 시간을 즐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고열을 앓고 기력이 없어서 여행 첫날은 별 감흥이 없었지만, 조금 회복한 후에 제 눈에 들어온 보라카이는 저 에메랄드 바다와 흰색 보다 더 하얀색의 모래가 이 별의 주인인 것 같은 거대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보라카이의 모든 것에 감동을 느낄 무렵, 셋째 아이의 고열이 갑자기 다시 시작됩니다.
열이 떨어졌다가 다시 오른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세 아이의 엄마는 그 상황이 너무 걱정되고 초조합니다. 해열제로 다시 열을 떨어뜨리고,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무렵. 저의 기침이 시작됩니다.
기침을 하는 중간에 재채기가 나오고, 재채기를 하는 동시에 기침이 나오는 몸의 이상신호에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다음 날 내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감기가 폐렴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셋째 아이도 폐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다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방문했고, 아이는 폐에 이상이 없다고 하여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제야 보라카이가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 아름다운 섬에서 나는 감기와 사투를 벌였구나 생각하니 서럽기도 하고, 내가 반드시 다시 가겠다는 다짐도 합니다.
폐렴을 치료하는 항생제를 먹고 크게 호전되고 있을 때, 큰 아이가 기침을 시작합니다. 큰 아이 학교에서는 지금 유행하는 감염병에 대해 알리미가 옵니다.
아이가 약을 열심히 복용하고 있는데, 해열제에도 39.5도의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결국 응급실로 갑니다. 폐렴이라는 진단을 받고 6가지 종류의 약을 처방받아서 귀가합니다.
먹구름이 비를 몰고 다니는 것처럼, 저의 여행일정에는 별이 아닌 병이 따라다닙니다.
지난 1월의 몽골 여행 전에도 심한 장염에 걸려서 거의 반은 녹초가 되어 몽골에 도착했습니다.
작년 제주도 여름휴가 때에도 아이 감기로 심야에 제주시의 병원을 찾아다녔습니다.
2년 전의 베트남 여행에서는 제가 장염에 걸려서 하루 종일 구토를 하여 혼자 숙소에 남아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지독하게 앓고 난 후에 여행지의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렇게 아름답고 특별할 수가 없습니다.
백혈구들이 사투를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내 몸이 백지상태가 된 건지는 모르지만, 베트남의 그 푸른 가을하늘, 몽골의 맑은 눈송이, 보라카이의 끝이 없는 에메랄드 바다에 내가 제대로 녹아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갈 때 숙제를 내려놓고 가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지만, 저는 매번 여행을 다닐 때 숙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나중에는 자가번식까지 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자주 무너지면서 우리 집이 호텔 같기도 하고, 호텔이 우리 집 같기도 합니다. 가끔 낄낄 웃음이 나옵니다.그 낯선 여행지에서 매번 휴식이 아닌 생고생을 하고 오니,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그래도 여기는 우리의 생활반경이니까 괜찮다며 잘 넘기는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는 결혼기념일 제주도 캠핑을 갑니다. 전기선 하나도 없는 시멘트 바닥에 텐트를 치고 자는 3박 4일의 일정인데, 남편과 저는 또 어떤 일들을 마주하게 될지, 이번에는 병이 아닌 별이 따라올지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저는 전생에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혜성이었나 봅니다. 혜성이 지구에 추락하여 이곳저곳 여행을 하면서 우당탕탕 사고를 막 치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굴러다니는 혜성인 저에게는 여행도 일상도 매번 낯설고 신기하고 재미있고 전부 숙제인 것 같습니다.
여행을 가서 아프고 힘들어도 내 마음속의 사랑이 낯선 땅으로 흐르고, 낯선 대지의 힘과 자애, 용기가 내 안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