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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느 Nov 10. 2024

가족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각기 다른 4명의 인격체가 부대끼며 한 집에서 살고 있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따뜻하고 끈끈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족쇄 같기도 한 우리 가족이다. 자유로운 영혼에 자기주장 확실한 큰딸, 자기애 강한 남편, 집안일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고 싶은 엄마, 고래 같은 세 인간의 싸움에 진작부터 납작한 새우가 되어버린 막내.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한 시점이 되면 낯선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아이들이 그렇다.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일주일들에 놀라지만 그 속도만큼 아이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무심한 엄마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느 날 오후 유나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은엄마, 몇 주전부터 경은이가 학원 차량에서 같은 반 서준이 안테 손가락 욕(가운데 손가락)을 한다고 유나가 얘기하더라고. 내가 평소 경은이를 잘 알잖아. 에이 설마.. 네가 잘못 봤겠지 하고 넘어갔지. 그런데 오늘 아이가 속상해한다면서 경은이가 어떤 아이인지 서준엄마가 묻더라고..."

어머나, 손가락 욕이라니! 평소 둘째 아이의 성격으로는 상상되지 않았다. 자신의 주장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는 조용한 아이, 초등학교 고학년인 지금까지도 친구와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는 아이. 엄마의 속상한 마음 어루만져주던 어여쁜 아이가 어느새 변해버린 것일까. 내 앞에서만 순한 양처럼 지낸 것일까. 아이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물음표를 가득 안고 퇴근했다.


아이는 그 행동이 잘못된 행동인 줄 몰랐다고 한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남자아이들에게 손가락 욕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장난치는 것이 재미있어 보여 따라했는데 서준이 반응이 재미있어서 계속하게 되었다고.. 평소 말없고 존재감 없던 아이의 느닷없는 행동에 서준이는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한 달간을 말이다.  엄마가 아이의 친구관계, 학교생활에 너무 무심했구나. 고학년이 되니 또래 관계가 중요해져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서로를 모방하며 노는 시기가 온 것이다. 아이에게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와 서준이가 받았을 충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 부끄러우니 식구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비밀로 하는 대신 서준이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손가락욕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친구들이 하는 행동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지 않기로도 약속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밤 큰아이와 한바탕 난리가 났다. 큰아이는 올해 내신이 치열한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성적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도움을 받아보려 학원을 다니지만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집에 있는 시간 대부분은 휴대폰을 하거나 그림을 그렸다. 공부 의지가 보이지 않는 아이의 학원비대신 부부의 노후를 위한 저축이 시급한데 말이다. 하필이며 그날 밤, 내 속마음을 아이에게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대학 안 가도 된다는 엄마 말에 발끈하는 딸과 실랑이를 벌였다. 참 신기한 것은 남편이다. 아이가 중학교 때까지는 육아에 일절 관여를 않더니 고등학교 입학하고서 사사건건 관여를 하는 것이었다. 성적에 대해, 언어사용에 대해, 부모 존중에 대해.. 그날밤 나는 둘 사이를 중재를 해야 했다.

퇴근하고서 둘째와 첫째, 예상치 못한 남편의 관여에 견딜 수 없을 만큼 피로해졌다.


나는 나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다. 조용히 책 읽으며 마음의 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 생각이 문장이 될 때까지 쓰고 지우며 한 단락의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내 것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쏜쌀같이 지나는 시간이 아까웠고 그 시간을 집안일로 보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내 시간의 값어치가 제대로 매겨지고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무얼 하는지 방에 들어가 웬만하면 나오지 않았고 남편은 매주 3,4회는 10시가 넘어서야 귀가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집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은 엄마라니..


우리 집은 나에게 족쇄가 되어버린 것인가.

아니..우리 집은 모두에게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대로 와해되는 것인가.

대충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고민 끝에 처음으로 가족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다.


이번주 토요일 7시 가족회의를 개최합니다. 모두 그 시간에 거실로 모여 주세요.


고1 큰딸: 요즘 어느 집에서 가족회의를 해. 엄마 쫌 오버하는 거 아냐?

남편: 가족회의? 왜 또 무슨 일 생겼어?

초등고학년 둘째 딸:.. 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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