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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tro Apr 30. 2022

초고적 위로 사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만행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뉴스를 통해 매일 보는 소식들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반대한다는 명분 아닌 명분을 들고, 한 집안의 가장이자 누군가의 배우자, 애인, 자녀인 군인 또는 민간인들이 총구를 서로 겨누는 그 상황은 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우울감을 준다. 한 명의 극악무도한 지도자 때문에 정작 침공의 이유와는 전혀 관계없는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아이러니. 이 지옥 같은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다.

  우리나라 역시 이와 비슷한 역사를 지니고 있기에 이러한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자는 도중에 집이 폭격당하고, 가족들이 총에 맞아 눈앞에서 죽는 것을  그들의 아픔은  누구도 달래줄  없을 것이다.  모든 아픔들을 우리나라의 이른바 전쟁세대 역시 기억하고 있고, 심지어 우리나라는  이후로도 이념갈등으로 많은 희생자를 낳지 않았는가. 지금은 그때의 사실이 다양한 콘텐츠 속에서 되짚어보는 역사가 되었지만, 우리의 아팠던 과거가 누군가에겐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런 우크라이나를 위로하기 위해 한 나라에서 종이학을 접어 보낸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화가 치밀었다. 위로라는 것이 깊은 슬픔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의 감정을 달래주기 위한 행동이라면, 무엇보다 위로를 받는 수용자의 처지와 형편을 우선 고려해야 할 텐데, 지금 당장 의식주 해결이 어려운 이들에게 먹지도 쓰지도 못하는 종이학이라니! 수용자의 필요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어쩌지 못하는 이 마음을 '발설'해 버리는 그 행위 - 단지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뿐이 아니었는지, 이 뉴스의 후속 기사에서 확인한 사실은, 우크라이나에서 원하지 않아 결국 종이학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뉴스는 공교롭게도 - 고향인 미국을 떠나 포탄이 날아다니는 우크라이나에 가서 - 그곳의 참상을 보도하는 사명감 넘치는 기자들의 뉴스 옆에 있었다. 이름만 대면 이미 다 아는 기자들이고, 그중엔 자식이 있는 기자들도 있었다. 여자도 남자도 있었고 이미 충분한 명예와 재산을 가진 앵커들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 뉴스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만든 콘텐츠였고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에게 보내는 전 세계인들의 위로다. 그러나 그 방식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누군가는 자기 자식 같은 아이들이 있는 그곳으로 직접 달려가 처참한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피해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동원하며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넨다.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는 트렌드로서의 '위로'하는 행위를 그저 흉내내기에 바빴다. SNS 콘텐츠에 '좋아요' 버튼 한번 누르는 것처럼, 잘 팔리는 해시태그 여러 개 나열하는 것처럼, '위로'라는 트렌드에 그저 뒤처지지 않으려는 단지 그뿐인, 그저 발설하고 마는 행위들.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이 '위로'라는 콘텐츠는 매우 인기 있는 주제였다. 베스트셀러나 SNS에서 잘 보이는 콘텐츠였고 반복되기까지 하는 일부 '아니면 말고' 식의 초고(草稿)적인 위로들은, 정작 위로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피로감으로 다가온다. 이런 콘텐츠들의 물량 공세에 당하며, 나 역시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고, 자연히 헤밍웨이의 명언이 떠올랐다.      

       

  소설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작가 '헤밍웨이'는 생전에 글쓰기의 어려움을 자주 토로했다,

  글 쓰기의 어려움과 관련해서 그가 한 말 중, 가장 직접적이고 명료한 표현을 꼽는다면, 바로

  'The first drft of anything is shit.(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시작 부분을 적어도 쉰 번은 다시 썼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니 저 말의 방점은 쓰레기 같은 초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걸작으로 변모시키는 '초인적인 수정 작업의 어려움'에 찍혀있다.

  

  일반적인 글에도 이렇듯 많은 고민과 수정이 필요한데, 메시지 수용자의 특수한 상황까지 고려해야 하는 '위로'를 목적으로 하는 콘텐츠라면 다른 어느 주제보다 더욱 공들여서 시작하고 끝맺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의 장르가 에세이이건 희극이건 비극이건 간에 어휘 선택 하나까지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주제가 바로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요즘의 '위로' 콘텐츠들은 유행처럼 가볍고 쉽게 퍼져나가 초고 상태 그대로 각종 미디어를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회 속에서 정작 위로받아야 할 주인공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상대의 처지에서 그 아픔을 곱씹어보고 어떤 말이나 도움을 주어야 할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 초고적인 위로. 그런 위로는 우크라이나에 보내는 종이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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