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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Sep 18. 2023

친정엄마가 이젠 힘들다고 하셨다


1. 엄마가 힘들어한다.



2021년 9월, 첫 손주를 품에 안은 친정엄마는 나보다 더 기뻐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게 말했다.


"정말 잘했다, 너무 잘했어! 아무 걱정하지 마, 엄마가 다 도와줄게!"


갓난쟁이를 생후 6개월 아기까지 키워놓고 회사에 복직했을 때,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무 걱정 말고 회사 생활 잘해! 엄마도 워킹맘으로 너네 셋 키운 거 알지? 둘째 낳아도 돼, 엄마가 또 키워줄게!"


엄마는 아들 민준이를 정말 잘 키워주셨다. 민준이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돌 즈음부터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감격스러운 첫걸음마의 감동은 금세 지나갔고, 우리는 두 팔이 자유로워진 돌쟁이의 엄청난 말썽을 마주했다. 앞만 보고 달리는 통에 이마와 무릎 성할 날이 없었고, 손에 닿는 모든 물건을 집어던졌다. 민준이를 낳은 지 1년이 된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둘째 생각 없다면서. 피임은 잘하고 있는 거지? 여기서 한 명 더 추가되면 큰일 난다. 감당 안돼."


아이를 낳은 지 1년, 엄마는 나만큼 늙어버렸다. 아이를 달래고 안아 올리면서 우리는 똑같은 팔꿈치와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아니, 오히려 엄마의 피해가 더 컸다. 우리 삼 남매를 키우느라 이미 연골이 닳아버린 팔과 무릎은 10kg짜리 손주를 돌보느라 또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엄마의 병원 출입이 잦아질수록 내 죄책감도 함께 커졌다. 나는 엄마 품에 손주를 안김으로써 행복과 고통을 모두 건넨 불효녀가 되었다.



2. 아들은 할머니의 사랑과 건강을 먹고 자랐다.



민준이가 생후 6개월이 되었을 때, 이제 겨우 아기의자에 앉을 만큼 자랐다. 거실에 아기매트를 펴고 장난감을 펼쳐놓으니 신나게 잘 놀았다. 아직 혼자서 돌아다니진 못했다. 덕분에 양육자는 민준이를 아기매트 위에 올려두고 잠시 TV를 보거나 집안일을 할 수 있었다. 1차 육아 황금기였다.


이즈음에 나는 회사에 복직했다. 어린이집을 보낼까 고민하다가, 말도 못 하는 어린것을 혼자 어떻게 두겠냐며 친정엄마가 대신 봐주겠다고 했다. 내심 엄마가 봐주길 바라면서도 차마 말로 옮기진 못했던 나로서는 엄마에게 고맙고 죄송스러웠다.


"아유, 요 입 좀 봐라. 너 어릴 때 얼굴 보는 것 같다. 이렇게 이쁜 애랑 있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러니? 아무 걱정 마."


엄마 덕분에 나는 무사히 워킹맘이 되었다. 7시 30분 즈음 아기를 차에 태워서 친정집에 내려놓은 후 회사로 출근했고,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해서 다시 친정집으로 왔다. 아기는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짝짜꿍을 하더니 몇 달 뒤에 엄마, 아빠, 할머니를 말했고, 11개월부터는 네 발로 온 집안을 기어 다녔다. 아이의 행동반경이 넓어질수록 엄마의 보육 반경도 넓어졌다. 심지어 몸무게도 10kg으로 무거워졌다. 엄마의 팔다리와 허리가 점점 과부하 됐다.


민준이 돌잔치를 마친 가을, 나는 엄마에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자고 말했다. 엄마는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대신 엄마가 오후 4시에 하원해서 집으로 데려올게. 저녁까지 혼자 두기엔 엄마 마음이 안 좋으니까. 넌 지금처럼 퇴근하고 우리 집에 와서 민준이 데려가렴."


어린이집에 입소하면서 엄마의 육아 스케줄이 바뀌었다. 아침에 민준이가 친정집에 도착하면 이유식을 먹인 후 9시에 어린이집 등원, 오후까지 개인시간을 보내다가 4시에 어린이집에서 민준이를 하원시켰다. 아기를 집으로 데려와서 놀아주고 밥을 먹이면, 저녁 6시 반쯤 내가 친정집에 도착하고 비로소 엄마도 육퇴(육아퇴근)했다.


초보엄마와 친정엄마의 루틴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아침 해가 뜨면 엄마는 회사 & 할머니는 육아 출근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퇴근한다. 아기는 할머니의 사랑과 건강을 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말썽꾸러기 어린이가 되어서 집과 어린이집, 놀이터와 키즈카페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웃는다. 엄마와 할머니도 힘들게 웃으면서 아이의 성장을 바라본다. 똑같지만 다이내믹하고 힘들지만 행복한 매일매일이 계속된다.



3. 불효녀의 효도



아이를 낳기 전, 부모님께 대한 최고의 효도는 선물이었다. 생신과 명절마다 드리는 (적지만) 용돈 외에도, 퇴근 후와 주말에 종종 들러서 최근 유행하는 빵과 간식거리를 선물했다. 우리 엄마는 맛있는 빵과 분위기 있는 카페를 좋아하는 소녀 감성이었다. 주말에 딸과 함께하는 데이트 혹은 딸네 부부가 여행 갔다 사 갖고 온 유명 디저트를 받으면서 행복해했다.


아이를 낳은 후, 엄마에게 필요한 선물이 많이 바뀌었다. 빵과 디저트보다는 몸보신해서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홍삼이 더 필요했다. 격주로 신경외과와 정형외과 치료를 받았고 가끔 마사지샵을 찾아서 뭉친 근육을 풀어야 했다. 황혼육아로 가속화되는 노화를 어떻게든 멈추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는 '민준이 엄마 본연의 역할'이었다. 퇴근 후 빨리 친정으로 달려와서 민준이를 데려가는 것, 감기 걸리지 않도록 컨디션을 잘 관리해서 어린이집을 무사히 보내는 것, 그리고 유연/재택근무 등 회사 복지를 활용해서 엄마의 육아 부담을 줄여주는 것. 나는 이미 불효녀지만 최악만은 면하기 위해서 발을 동동거렸다.


다행히 회사 복지가 좋은 편이다. 유연근무제로 5시 반 퇴근이 가능하고 가끔 재택근무도 할 수 있다. 특히 매월 째 주 금요일엔 오전근무 하는 공짜 반차라서, 모든 직원들이 손꼽아 기다린다.


민준이를 낳은 후, 우리 집에선 총 3명의 사람들이 셋째 주 금요일을 기다린다. 나와 남편 그리고 친정엄마. 나는 일이 빨리 끝나서, 남편은 내가 평소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친정엄마는 어린이집 하원을 내게 맡기고 푹 쉴 수 있는 휴일이기 때문이다. 친정 달력에도 매월 세 번째 금요일엔 빨간색 펜으로 크게 동그라미 표시되어 있다.


매월 말, 엄마가 내게 묻는다.


"다음 달 휴가는 언제니? 아빠랑 같이 운동 나가려고 하는데, 그날 휴가내거나 재택근무할 수 있어?"


나는 엄마의 부름에 응한다. 못난 딸 대신 주양육자의 무게를 짊어져 준 엄마의 휴가를 위해서 연차를 내고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움을 구한다. 불효녀일지언정 엄마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4. 최고의 효도는 예쁜 손주



이렇게 힘듬에도 불구하고, 손주를 안은 엄마의 표정은 더없이 밝고 행복해 보인다. 민준이가 조금만 울어도 '어이구 내 새끼'를 외치며 나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제철과일이나 좋은 간식을 살 때면 제일 먼저 민준이 몫을 챙긴다. 이젠 친자식인 나보다 친손주 민준이의 방문을 더 반긴다. (가끔 나 혼자 친정에 가면 실망한 표정이다.)


셋째 주 금요일 회사가 일찍 끝나는 날, 모처럼 엄마와 점심 데이트를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브런치집에서 음식을 잔뜩 시켰다. 수플레가 너무 부드럽다며 좋아하는 엄마를 보고 불쑥 말했다.


"엄마는 민준이가 그렇게 예뻐? 나보다 더 좋아?"


엄마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눈을 했다가, 곧 웃는 표정으로 바꾸고 대답했다.


"그럼! 우리 민준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왠지 알아?"


귀를 쫑긋 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 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쁠 때의 모습으로 다시 내게 온 것 같아. 울고 웃을 때 표정이 너 어릴 때랑 똑같아. 그땐 엄마도 어리고 서툴러서 육아가 많이 힘들었거든? 너한테 못해줬던 것, 민준이한테 실컷 해주면서 엄마의 그간 고생이 보상받는 것 같아. 내 삶이, 우리 딸과 손주를 통해서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싶어."


엄마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책에서 읽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직접 임신/출산해서 후손을 남기는 것이 어려워지므로, 대신 손주를 양육함으로써 유전자가 명령하는 번식 본능 욕구를 충족한다고. 책을 읽을 땐 '참 건조하다' 싶었던 사실이, 엄마의 손주 사랑 고백으로 들으니 가슴 벅찬 진실로 느껴졌다.


"엄마, 고마워. 민준이 진짜 잘 키울게!"


점심을 먹고 엄마와 함께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아직 여름의 푸른 기운이 가득한 나뭇잎 사이로 가을을 알리는 바람이 불었다. 눈과 얼굴 그리고 마음까지 시원했다. 내가 느낀 행복감을 전달하려고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도 내 손을 꼭 잡았다. 손의 온기를 통해서 엄마의 행복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안심된다. 그 속에서 나와 우리 아들도 더없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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