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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Dec 31. 2020

서른 살 D-1

Bye 20대    Welcome 30대

오늘 내 20대의 마지막 날인, 29살 12월 31일이다.

마냥 오지 않을 것 같고 까마득했던 삼십 대가 몇 시간 직전으로 훌쩍 다가오니 싱숭생숭하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20대를 처음부터 다시 살 수 있게 해 준다면 돌아갈 거냐며 질문한 적 있었다. 그때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라고 답했다. 내 20대는 너무나 치열했고 외로웠기 때문이다. '20대가 청춘이고 가장 좋은 시절이다'라는 말은 20대를 치열하게 살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프레임에 불과하다고 열변을 토했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20대를 다시 살지 않겠노라 확신에 차서 말했었는데, 막상 20대를 이렇게 보내려니 괜히 아쉽고 하루라도 더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나는 20대 내내 일도 연애도 열심히 였던 것 같다. 일과 연애를 거듭 실패할 때마다 엉엉 울며 보낸 시간들이 많았지만, 그 시간들 동안 나는 30대를 잘 살아갈 수 있는 혜안을 얻었다.


이십 대 초반.

나는 삼수까지 해서 들어간 학교에 적응을 못했다. 여대라는 특성도 있었지만 내가 그렸던 캠퍼스 라이프와 현실은 너무 큰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내내 우울해하며 지냈던 것 같다. 공강 때마다 학교 앞 자취방 침대에 누워 부모님 보고 싶다며 훌쩍거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점점 학교 특유의 개인주의에 적응하기 시작하고 또 마음 맞는 친구들도 한 두 명씩 사귀게 되면서, 왁자지껄했던 10대와 다른 내 20대 라이프에 나름 적응해나간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때 우연히 나갔던 미팅에서 첫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었던 터라, 미팅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대학교 1학년 때가 아니면 미팅할 일 없다는 말에 속아 얼떨결에 안 친했던 동기들 사이에 끼어서 나갔었다. 그때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라는 감정도 잘 모를 때였다. 그런데 미팅이 끝난 후 내게 마음에 든다며 쫒아왔던 남자애가 있었다. 옆 학교 공대생이었다. 그 당시 그 친구가 공부만 했던 티를 많이 못 벗었는지 지금 떠올려보면 더벅머리에 뿔테 안경을 썼다는 사실만이 뚜렷하게 기억난다.

그 친구와 어설프게나마 연애라는 걸 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설렘보다는 그저 '연애를 한다'라는 사실에 취해있던 것 같다. 얼떨결에 시작했던 연애였던지라 얼떨결에 헤어졌다. 그때 난 집에서 엉엉 울며 창피하지만 4번 정도 매달렸다. 고작 3개월 사귀어놓고 왜 그렇게 매달렸냐고 묻는다면 그저 오기였다고 답하고 싶다. 그 친구가 너무 좋아서가 아닌, 그냥 20대 초반 외로웠던 내 라이프에 누군가 한 명 또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그 부재감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 친구는 그저 첫 연애를 했을 뿐 첫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주기엔 과분하다.

나의 두 번째 연애는 우연히 나갔던 학회 활동에서 시작됐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 안 나지만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내게 번호를 물어봤고 느낌이 나쁘지 않았던 나는 그렇게 두 번째 연애를 시작했다. 그 친구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놓쳐본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했다. 반면 나는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2점대 학점을 근근이 유지하며 계절학기로 부족한 학점을 채우기 일쑤였는데..

'왜 저렇게 열심히 살까?', '등록금이 아깝지도 않나?'

너무 다른 서로이다 보니 우리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우린 너무 달랐지만 나는 '호구의 사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 친구에게 A to Z 맞춰줬다. 어느 정도 성숙해진 29살의 시각에선 가장 미련한 연애방식이었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 해야지 안 헤어지는 줄 알았다. 어쨌든 너무 맞춰주는 내게 질려버렸던 건지 평소에 다혈질이었던 친구가 공공장소에서 내게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리고 아수라백작 마냥 갑자기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그 남자애를 보며 처음으로 남자가 무섭다고 느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차였다. 이야기 전개상으로는 놀란 내가 헤어지자 하는 게 맞지만, 내가 찰 거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가 질세라 먼저 이별통보를 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안암역에서 이대역까지 오는 내내 울면서 왔더랬다.

"다시는 연애 안 해!"

친한 친구 말에 의하면 매번 연애가 끝난 후 하는 나의 단골 멘트라고 한다. 아무도 말린 적 없는데 혼자 다신 연애 같은 거 안 한다고 씩씩거리다가 어느샌가 또 진짜 끝사랑을 찾은 것 같다며 헤헤거리고 있다고 한다.

안암에서 차인 후 다신 연애 안 할 거라며 엉엉 울던 나는 그렇게 반년 뒤 세 번째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별 기대 없이 나갔던 소개팅에서 사귀게 됐는데, 첫 만남에 고기를 구워 먹다가 내가 몇 번 웃겨줬더니 "00씨 같이 웃긴 여자 처음 봐요!" 하면서 나한테 계속 연락했다. 웃긴 여자가 처음이라니..? 어이없었지만 무슨 생각이었던 건지 어느샌가 나도 사귀고 있었다. 그러나 더 어이없었던 건.. 걔는 양다리였다. 그것도 나랑 같은 학교 여자애랑! 더 심한 욕이 나오기 전에 이 친구와의 연애 썰은 여기서 마친다.

이십 대 초반 연애를 돌이켜보면 누군가 좋아서 사귀었다기보다 외로워서 사귀었던 것 같다. 혼자라는 공허함과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사람을 본능적으로 찾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매번 연애가 끝날 때마다 오롯이 내편일 수 있는 존재는 애초에 부모님 외엔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십 대 중반.

다행히 나는 남들에 비해 진로를 빨리 찾은 편이었다. 우연히 광고공모전에 나갔다가 수상한 후 재미를 붙였고, 그 뒤로 나가는 공모전마다 상을 타면서 광고회사에 취업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뒤로 나는 몇 년 동안 광고회사 하나만을 지원하며 취업 준비했다. 남들처럼 취업지원서를 몇십 군대 넣어도 모자랄 판에, '광고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 때문에 취업 준비가 남들보다 좀 오래 걸렸다.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인턴 한 곳만 세어도 네 군대나 된다. 주변에서 말하길 나는 '취업 불운아'였다. 힘들게 들어간 좋은 회사가 하루아침에 매각돼서 쫓겨나기도 하고, 매번 끝자락에서 떨어지는 등 나는 매번 고스펙에 비해 잘 안 풀리는 그런 이미지였다. 그 사실이 너무 답답해서 가장 친한 친구와 매번 술 마시며 한탄했던 것 같다.

진짜 가고 싶었던 회사가 난데없이 매각된 후 방황하던 차, 친한 친구가 요새 뜨는 회사라며 써보라고 추천해줬다. 평소 가고 싶었던 회사도 아녔지만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어디든 다녀야겠다는 압박감에 지원했고 좋게 봐주신 본부장님 덕에 하루아침에 취준생 신분을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취준생 신분이 더 달콤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곳은 지옥이었다. 평균 퇴근시간은 새벽 3시에 주말 포함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당연히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기절도 왕왕했다. 사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당장에 그만두고 부모님께 손을 벌려도 됐었는데, 이상하게도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 갇히면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되는 걸 느꼈다. 하루하루 위태했지만 지금 나를 둘러싼 상황에서 어떠한 변주라도 있으면 무너질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과 더불어 집 오면 단 몇 분이라도 더 자야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쳐내기 바빴다.

그렇게 2년쯤 흘렀을까? 너무 힘들었던 나는 이대로 하루라도 더 보내면 죽겠다는 생각에 더 작은 회사로 이직했다. 이직이라기보다 어쩌면 도피가 맞을지도 모른다. 이성을 잃었던 시기에 했던 선택은 역시 올바르지 못했다. 버티다 버텨 간 그곳은 더 지옥이었다. 이전 직장에서는 신체적으로 힘들었다지만, 도망친 곳에서는 성희롱과 고함을 일삼는 상사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까지 덤으로 얻었다. 하루라도 당장 그만두는 게 맞았지만 그 당시 나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힘든 사실을 부모님께도 숨기고 무조건 버텨야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버틸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미친 상사 밑에서 섬노예 마냥 세뇌당하고 있었다. 그런 압박과 희롱이 으레 당연하다고 여기며 말이다. 일주일에 약 3일 정도를 밤새는데, 어느 날 새벽에 숨이 안 쉬어졌다. 이상하다 느낀 나는 화장실에 숨어서 숨을 쉬는데 점점 앞이 뿌예지고 기절할 것 같았다. 나중에 되어서야 그게 공황장애였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던 찰나 상사가 술 마신 후 내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고, 나는 그다음 날 짐을 싸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29살에 그토록 좋아했던 광고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길었던 취준, 회사 매각, 미친 상사 등 인생에서 한번 마주칠까 말까 한 일들을 몇 년 안에 겪고 나니, '내 것이 아닌 걸 억지로 붙잡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많이 우울했고 정말 많이 울었다. 그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고, '이런 광고도 만들어보고 싶고, 저런 광고도 만들어 보고 싶다'하는 꿈이 가득했는데 자꾸 타의에 의해 쫓겨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힘든 와중에도 연애는 했다. 이십 대 중반 어느 여름 신촌에서 알바하다가 만난 사람이었다. 그렇고 그런 뻔한 전개로 눈이 맞은 우리 둘은 불같이 연애했다. 매일 밤 연남동을 산책하고 신촌에서 같이 밥을 먹고 좋아하는 노래를 공유하고 드라이브를 다녔다. 고시생이었던 그 사람 따라 책 쇼핑도 같이 가고,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서 계절학기를 F 맞는 등.. 지금 생각하면 꼴값이지만 그 당시엔 현실을 잊게 할 만큼 달콤했다는 말이 딱이었다.

그렇게 요란했던 연애의 시작은 모든 연애가 그렇듯이 점점 바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끊어지기 직전의 늘어진 고무줄처럼 위태위태했지만 서로를 놓지 못했다.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연애였음에도 놓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 정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반추해보건대 모든 것이 힘들었던 때 내 삶에서 뭐 하나라도 달라지면 정말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생각에 지독히도 그 사람을 붙잡았던 것 같다.


이십 대 후반.

거짓말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사람과의 인연도 29살이 되어서야 정리할 수 있었다.

힘들었던 시절이 불과 작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29살이 되자 모든 게 하나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광고를 그만둔 후 별 기대 없이 지원했던 회사에 덜컥 붙게 됐고, 기대 없이 갔던 회사가 생각보다 괜찮은 회사였다. 그리고 얼떨결에 바뀐 진로도 생각보다 재밌었고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 그곳에서 인생에서 한번 만날까 말까 한 귀인을 만나기까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치열하게 살아온 나 자신을 돌이켜볼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망가졌던 몸을 위해 병원들을 다니기 시작했고, 운동도 시작하고,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시도하며 여유까지 찾기 시작했다. 그 덕에 나를 갉아먹으면서도 끝까지 놓지 못했던 인연도 놓을 수 있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내 주변 모든 것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늘 '내게도 좋은 날이 올까?, 늘 노력해도 안 되는데 굳이 왜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만 곱씹으며 살았는데, 거짓말처럼 해가 바뀌자 내 주변 모든 것들이 점차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십 대 끝자락이 되어서야 '인생은 알 수 없다'는 진부 하디 진부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신이 있다면 장난을 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이제 더는 더딜 곳이 없다고 느끼던 벼랑 끝자락에서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길이 생겼다.


이제 겨우 서른 되는 내가 마치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할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지난 이십 대를 돌이켜보니, 인생도 참 살아볼 만 하구나 싶다. 정말 죽겠다 싶었던 시기에도 배운 게 있었고,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돼'하며 울었던 그 시간들조차도 내 삼십 대를 잘 맞이하기 위한 거름이 됐다.

누군가는 내게 번번이 연애를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몇 번이고 이별의 쓴맛을 본 덕에 사람을 거르는 안목을 갖게 됐다. 진짜 좋은 사람은 몰라본다 쳐도 진짜 아닌 사람은 걸러낼 수 있게 됐다.

또한 그토록 좋아했던 광고가 비록 실패한 짝사랑으로 그쳐버렸지만 새로 만난 일을 사랑해보려 한다.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안고 말이다.

글을 쓰다 보니 잊고 있던 사람들도 많이 떠올랐다. 이십 대에 나를 짧고 길게 스쳐간 모든 인연들이 아쉽지만 스쳐간 인연에 아쉬워하지 않겠다. 그저 내 삼십 대에도 함께 할 수 있는 인연들이 있음에 감사하며 이들에게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곱씹는다. 그리고 모든 인연은 소중한 거라지만, 때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인연을 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빈자리가 있어야 또 다른 인연이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마냥 무섭고 아득했던 서른.

뭐든 내 외롭고 치열했던 이십 대 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안정돼 있겠지, 라는 기대를 안고 맞이해보려 한다.

삼십 대에 만날 새로운 인연들도 오느라 고생했다며 두 팔 벌려 안아줘야지.


아듀 2020.

아듀 내 이십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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