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케이 Jan 28. 2021

‘이별’과 ‘작별’의 차이

숱한 이별, 그리고 끝은 작별.

오랜만에 이십 대 초반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를 만났다. 소소한 일상을 주고받던 중 친구가 내 전 연인을 대화의 소재로 던졌다. 헤어진 지 꽤 됐지만 오래 사귀었던 탓에, 마치 연예인 옆에 붙어 다니는 연관검색어 마냥 한동안 나를 따라다닐 키워드인가 보다.


"몇 년 동안 지겹게 헤어졌다 사귀었다를 반복하길래 절대 안 끝날 줄 알았는데.. 이번엔 어떻게 딱 끝을 맺었어?"

"이번에 헤어졌을 땐 진짜 끝이구나 싶은 촉이 오더라고"

"그런 촉이 있어?"


나는 친구의 마지막 말에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지난 숱한 이별들과 달랐던 마지막 이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연했다. 다 늘어난 고무줄 마냥 위태위태한 연애를 겪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감정이랄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우리의 마지막 헤어짐은 이전의 이별들과 달랐다. 이전에 헤어졌을 때는 욕이 절로 나오며 감정이 욱했지만, 마지막 이별 때는 모든 감정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번엔 진짜 끝이니까 다신 찾아오지 마. 나중 돼서야 후회된다고 연락하면 진짜 죽는다.'


지난 몇 년간 숱하게 겪은 이별의 상황에서 보냈던 메시지에는 분노지수가 꽤 높았다. 역설적이게도 끝이라고 말하지만 진짜 여기서 끝내기만 해 봐 라는 비장한 심보까지 담겨 있었다.

저런 뉘앙스의 문자를 보낸 뒤 혼자 씩씩 거리다가, 며칠을 못 참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진짜 이대로 끝낼 셈이야?'라는 식의 문자를 보낸다거나, 혼자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옷소매를 적시던 수순을 밟았다. 뭐랄까. 끝이라고 하지만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기면 또 다른 챕터가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 보낸 마지막 문자 내용은 달랐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그리고 어디서든 잘되길 진심으로 바랄게.'


마지막 이별했을 때 내가 보냈던 문자의 마지막 줄이다. 저 문자를 보낸 뒤 슬픔 혹은 미련보다는 후련함이 컸다. 그리고 '정말 이번엔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지난 이별들은 한 챕터의 갈무리였다면, 마지막 이별은 책 마지막 표지까지 완전하게 덮은 듯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의 스토리가 궁금하기보다 길고 길었던 장편소설을 완독 해낸듯했다.


요 근래 문득 '이별'과 '작별'의 차이가 궁금해져서 찾아보게 됐다. 생각의 시발점인즉슨 조상들은 '헤어짐'이라는 같은 뜻의 글자를 왜 굳이 두 개나 만들었을까였다. 그렇게 찾아본 뒤 알게 된 둘의 차이점은 나를 한동안 멍 때리게 만들었다.


-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 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

-


둘은 어쩌면 미묘한 차이 같아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굉장히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어제 친구가 내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담겨있었다.

내가 그 사람과 지난 시간 숱하게 울며 헤어졌던 그 순간들은 이별이었고, 몇 년의 인연을 마침표 찍었던 마지막 순간은 작별이었던 것이다.

원치 않게, 떠밀리듯, 속에 다른 뜻을 품고 헤어지자 했던 지난 순간들은 결국 마음속에 미련이라는 찝찝한 여지를 남겼었다. 반면 스스로 마음의 정리를 마친 후 고했던 안녕은 작별이었다. 역설적이게 슬프면서도 그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낯선 내 모습에 설렘까지 느꼈다.

둘 사이에 지난 몇 년을 종지부 찍을만한 특별한 부정이슈 따위는 없었다. 다만 몇 번의 이별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작별의 수순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헤어짐'

그러고 보니 단순히 '헤어짐'이라는 말은 또 여러 의미로 나뉠 수 있구나 싶다. 이별했지만 감정의 잔여물이 두텁게 쌓여 있는 헤어짐, 기꺼이 웃으며 떠나올 수 있는 헤어짐 등등.

주변 사람들이 질릴 정도로 지겹게 이별과 재회를 반복했던 전 연인과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다고 자신하는 이유는, 아마 내가 한 헤어짐은 '이별'이 아니라 '작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유치하지만 구질구질했던 지난 시간들 속 이별과는 달리 마지막 작별은 꽤나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다.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어 졌던 원치 않는 끝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택한 끝이기에 아름답게 갈무리할 수 있었던, 그런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던 끝 말이다.


조상님들이 굳이 같은 뜻의 단어를 두 개나 만들었던 이유가 있었다. '이별'이라는 단어는 대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슬픈 상황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기꺼이 안녕하고 말할 수 있는 이별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는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했지만, 때로는 어떤 이별은 만남보다 아름답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별'이라는 뜻은 꽤나 멋진 단어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교차선들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