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밝은 숲 Nov 23. 2023

김장이 그림을 만나서

김치를 그리다

올해도 작년처럼 김장을 했다. 내가 주체가 되어 김장을 해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라 작년처럼 배추김치가 맛있기를 바라면서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올해는 시아주버님과 큰형님이 농사지은 채소들로 김장을 했다. 밭에 가 동치미 무를 뽑고 쪽파와 대파를 뽑아왔다. 땅 속에서 무가 뽑히고 쪽파와 대파가 쑤욱 뽑히는 노동의 과정은 묘한 기쁨과 설렘이 있었다. 배추와 무가, 마늘과 생강이 어떻게 심어져서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시아주버님과 큰형님의 노동이 채소들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비와 바람과 햇볕이 그들을 자라게 했음을 짐작한다.


뽑아온 무와 쪽파와 대파 등을 넣어 동치미를 담고 절인 배추를 가져와 배추김치를 담갔다. 김장 양념에 쓰기 위해 남편은 하루종일 마늘을 까고 찧었다. 나는 생강을 벗기고 대파와 쪽파를 다듬고 씻으며 며칠에 걸쳐 김장을 했다.


동치미를 담고 배추김치를 담고 남은 양념으로 갓김치와 파김치를 담았다. 김치냉장고에 가득하게 겨울 양식이 준비되었다 생각하니 마음도 그득해졌다. 여력이 없어 김장을 못 하는 여동생이 생각나 김장한 김치를 나눠주기도 했다.


올해는 밭에 가 푸릇푸릇한 무청을 보고 대파와 쪽파, 배추와 갓들을 보면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인 김장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와 남편의 노동이 들어가고 그 이전에 시아주버님과 큰형님의 노동이 들어가고 그와 함께 자연의 지극한 자비가 들어간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어 그림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그냥 먹고 없어져 버리는 김치가 아쉬워서 채소들이 김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며 김치를 표현해 보고 싶었다.

우선 배추김치 한 포기를 도마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HB연필로 흐리게 스케치를 하고 수채화 물감을 써서 색을 칠했다. 처음 그려보는 채소라 낯설었지만 배춧잎을 하나씩 그려보기로 했다. 배추의 흰 부분은 고춧가루와 액젓, 매실액들을 머금어서 흰 빛이 아니다. 붉은 기도 있고 노란 기운도 돌고 잎맥 부분은 보랏빛과 청색을 혼합한 색이었다. 배추김치를 관찰하고 색을 고르고 만들고 칠하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배추김치의 전체와 부분을 조금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진다.


배추김치를 담은 김칫소가 남았고 갓도 남아서 갓을 소금물에 절여 갓김치를 담았다. 그릇에 담아 사진을 찍어 갓김치를 그렸다. 진한 청록빛의 갓김치는 부드럽게 절여져 그리기가 어려웠다. 빨리 그리고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이 조급함으로 이어져 자세히 관찰하고 천천히 그려야하는 힘을 막았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릴 때의 마음이 그림 속에 담겨 있음을 발견한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그림을 그리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마음이 들어가 있다. 잘 하려고 욕심 부리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오히려 잘 해 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해서 그 대상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쏟고 집중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운명이 혹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내가 그린 갓김치를 보며 다시 한 번 자연의 순리를 생각하고 마음을 추스린다.

파김치는 고춧가루를 머금고 아직 숨이 다 죽지 않은 파릇한 모습인데 쪽파의 초록은 다 같은 초록이 아니었다. 연둣빛에 가까운 초록, 청록에 가까운 초록,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수많은 초록들이 쪽파의 다양한 초록빛을 만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그리는 대상을 자세히, 그리고 천천히 관찰하게 된다. 빛깔과 모양, 전체적인 부분까지 계속해서 집중해 보게 된다. 그래서 그리는 대상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내가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는 그것이 그리는 재미인 것 같다.


올해는 김장을 하면서 눈에 보이는 실체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노동과 정성, 자연의 다사로움과 자비까지 다양한 섭리를 맛보았다. 그래서 추워지는 시절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은 것 같다.


일상을 그리고 쓰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자연의 너그러운 품을 내가 이해하는 방식이고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작가의 이전글 구멍가게의 사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